동방묘지 약탈
Looting of the Eastern Mausoleum동방묘지 약탈은 동청릉에 있는 중국 청나라의 주요 묘지 중 일부가 군벌 쑨다이닝의 휘하에 있는 군대에 의해 약탈당한 사건이다.
서곡
1928년 6월 8일 새벽, 군벌 쑨다이닝은 군대를 이끌고 허베이 성 준화 북서쪽 말란유에 있는 청 왕조 동방의 묘지로 들어갔다. 이곳은 청 황제와 황후의 마지막 안식처였으며, 자금성 북경에서 약 120km(75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다. 78km(30.1평방마일)의 매장지는 순지황제(1638~1661년), 강시황제(1654~1722년), 첸룽황제(1711~1799년), 다우거 시씨(1835~1908년) 등 15개 무덤 내 5명의 황제, 15명의 황후, 136명의 후궁들을 위한 것이었다.
약탈 작전
1928년 6월 12일 쑨다이닝은 휘파람과 율링묘의 거의 모든 지하 장물들과 푸샹유 이스트 딩링의 지하 궁전을 제거하는 대규모 그라버빙 작전을 명령했다. 장즈올린 28군 연대장 마후티안은 조용히 말란유를 점령하고 있었다. 쑨다이안잉은 자신의 사단 지휘관 중 한 명인 탄원장에게 묘지 구역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7월 2일 새벽에 마후티안은 쫓겨났고 탄의 군대는 말란유에 있는 묘지를 약탈했다. 그 후 쑨의 군대는 곧장 동청릉 지역으로 가서 이 지역에서 전쟁 훈련을 하는 척했다. 탄원장은 주변에 경찰관을 배치하고, 그 지역에 대한 접근을 거부했으며, 군대는 간섭을 막기 위해 "고분을 보호하고 있다"고 선언하였다.[1]
약탈 작전은 그의 차에서 내린 손다이닝에 의해 지휘되었다. 트럭들은 짐을 싣자마자 약탈품을 가지고 속도를 내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자정이 되자 공병대가 입구를 폭파하여 지하 궁전으로 통하는 통로를 열었다. 돌문을 열어 무덤의 뒷방에 접근할 수 있게 했다. 쑨양은 대대장급 이상 장교들에게 자신들을 위해 보물을 모으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했다. 일반 병사들은 결국 남은 음식을 가져갈 수 있게 되었다.[1]
강도들은 먼저 옥개수박, 메뚜기, 채소, 옥개연, 산호 등 시황후의 유골 주변에 놓여 있는 큰 보물들을 가져갔다. 그들은 시신 아래에서 발견된 물건들을 낚아채서 시체 자체를 황폐하게 하고, 그녀의 황실의 옷을 벗기고, 속옷과 신발과 양말을 벗기고, 그녀의 몸에서 진주와 보석을 모두 가져갔다. 약탈자들은 그녀의 턱을 벌리고 그녀의 입에서 희귀한 진주를 꺼내기까지 했다. 결국, 그들은 그녀가 살아 있을 때 치시가 가장 좋아했던 관 밑에 있는 물건들을 약탈했다.[1]
탄원장이 치시의 무덤을 털고 있을 때 쑨다이닝 휘하의 한다바오 여단장이 또 다른 무리를 이끌고 율링 묘지로 가서 전쟁 훈련을 할 뜻을 밝혔다. 그들은 지하궁의 입구와 출입구를 불어서 무덤 속으로 돌진했다. 치안롱 황제와 그의 두 황후와 세 첩의 관이 열려 있었고, 귀중품은 모두 약탈해 갔으며, 해골은 진흙 속에 던져졌다. 그러자 군사들은 율링묘와 푸샹유 동딩링의 지하궁으로 달려가 할 수 있는 것을 약탈했다.
신문들은 이 같은 비난과 함께 이 소식이 중국 전역과 전 세계에 퍼졌다고 보도했다. 사람들은 격분했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福yi)는 쑨양(孫陽)을 해임하고 장개석(張 kai石)에게 전보를 보냈으며, 옌시산(延西山) 베이징 주재 수비대 사령관, 궈민탕 중앙위원회, 지역 신문 등은 쑨다이닝(孫 sun)을 엄벌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쑨다이닝은 자신을 징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었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1]
선과 그의 군대는 무덤에서 보물을 제거한 후 빈 방을 돌로 봉했다. 그들은 중국의 가장 위대한 보물 중 일부를 운반했지만, 어떤 것들은 쉽게 제거할 수 없었고 무덤의 당당한 건물들은 여전히 살아남았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