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에리크 넬슨
Lars-Erik Nelson라스-에리크 넬슨(Lars-Eric Nelson, 1941년 10월 15일 ~ 2000년 11월 20일)은 뉴욕 데일리 뉴스의 신디케이트 칼럼으로 가장 잘 알려진 미국의 언론인, 정치 칼럼리스트, 작가였다.[1]
배경
라스-에릭 넬슨은 뉴욕 브루클린에서 쿠퍼 유니언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중 만난 이민자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리버데일에서 자랐고, 브롱크스 과학 고등학교에 다녔으며, 뉴욕 주립 레지던트 스콜라였다. 1963년에 넬슨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러시아어 학위를 받았다. 체코어, 프랑스어, 스웨덴어에도 능통했다.[2]
경력
넬슨은 이후 '소련의 다이제스트 오브 프레스', '버겐 카운티 레코드', '뉴욕 헤럴드 트리뷴' 등에서 활동했다. 넬슨은 1967년 로이터 통신에 특파원으로 입사하기 전 리버데일 프레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취재한 모스크바, 런던, 프라하에 게재되었다. 넬슨은 1977년부터 1979년까지 뉴욕 데일리 뉴스워싱턴 직원에 합류하기 위해 떠났을 때까지 뉴스위크 국무부를 취재했다. 데일리 뉴스에서 경력을 시작한 직후, 넬슨은 시한부 압박으로 유나이티드 프레스 인터내셔널의 오랜 기자의 이름을 딴 알버트 메리먼 스미스 메모리얼 어워드를 수상했다. Nelson은 1993년 Newsday의 칼럼니스트가 되기 전까지 약 10년간 The Daily News의 지국장이었다. 1995년에는 칼럼니스트로 뉴욕 데일리 뉴스에 복귀했다.[3]
Lars-Eric Nelson은 뉴욕 데일리 뉴스에서 신디케이트 칼럼으로 잘 알려졌지만, 뉴스 산업에서의 그의 경력은 40년 이상 지속되었고 그를 전세계로 데려갔다. 그의 작품은 <뉴욕 리뷰 오브 북스>, <네이션 매거진>, <마더 존스>, <포린 어페어스> 등에 실렸으며, 그의 칼럼은 전국의 신문에 실렸다.
1983년 12월, 로널드 레이건은 의회 명예훈장 수상자 청중들에게 연설하면서, 전 명예훈장 수상자의 고무적인 용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럽에 대한 급습에서 돌아온 B-17은 대공에 의해 심하게 발포되었다. 그 젊은 공 터렛 총잡이는 부상을 입었고, 그들은 비행하는 동안 터렛에서 그를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채널 너머로 비행기가 고도를 잃기 시작했고, 지휘관은 보석금을 내라고 명령해야 했다. 그리고 남자들이 비행기를 떠나기 시작했을 때, 마지막으로 떠나야 할 사람 – 당연히 비행기와 함께 내려가기 위해 뒤에 남겨지는 것을 알고, 겁에 질려 울부짖었다 – 비행기에서 나간 마지막 남자는 지휘관이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소년의 손을 잡고 '신경 쓰지 마, 아들아, 같이 타고 내려가자'고 말했다. 의회 명예 훈장이 사후에 수여되었다.[4] 넬슨은 이후 434개의 명예훈장 상들을 모두 점검했고 레이건의 이야기와 일치하는 표창을 찾을 수 없었다. 며칠 후 넬슨은 이렇게 썼다, "이건 사실이 아니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레이건 이야기인데... 미국 대통령은 300명의 실제 의회 명예훈장 수상자들이 모인 청중들 앞에 가서 그들에게 명예훈장 수상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5][6] 장애가 있는 베테랑 도미니크 안토누치는 넬슨의 칼럼을 읽은 후 이 이야기가 1944년 영화 '윙 앤 어 기도'의 한 장면과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넬슨은 "혼란과 더불어 다나 앤드류스는 한때 영광을 추구하는 젊은 조종사를 헐리우드가 아니다"라는 말로 질책했다. 관객 중 일부는 현실과 허구를 혼동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7] 후에 넬슨은 레이건의 이야기가 1944년 4월 <리더즈 다이제스트>지에 실린 허구적 설명과도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썼다.[8]
넬슨이 1995년 11월 뉴트 깅리치를 심문하는 동안 깅리치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에어포스원의 뒷자리에 앉게 했기 때문에 연방정부를 폐쇄했다고 시인했다. 그 다음날 악명 높은 데일리 뉴스 "크라이 베이비" 커버 스토리가 방영되었다.[9]
1998년, Meet the Press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동안, 넬슨은 팀 러서트에게 "팀, 당신은 이 쇼를 'ME the Press'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10]
2000년 11월 넬슨은 당시 플로리다 주 검찰총장이었던 캐서린 해리스가 플로리다 투표 논란에 중립적인 참여자가 아니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대선캠프에 상당히 관여했다는 이야기를 깼다.[11]
넬슨은 죽기 불과 몇 달 전 짐 레러와 함께 <뉴스 아워>에 게스트로 출연하며 원호 리의 <뉴욕 타임즈> 취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조사 보고는 의제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보고팀은 머릿속에서 아이디어를 얻거나 출처를 찾는데, 이런 내부자 출처를 갖게 되어 너무 기뻐서 회의적인 태도를 그만두게 된다. 화이트워터는 타임즈가 짐 맥두걸이 말한 버전을 믿었던 비슷한 경우였다. 나는 그가 특별히 좋은 출처는 아니었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짐 맥두걸의 화이트워터 버전이 그 사건을 주도했다. 이상하게도 이 사람은 그 사건에서 원호 리 시리즈를 했던 바로 그 기자다.[12]
넬슨이 원호 리 사건에 대해 보도한 결과 뉴욕타임스 A2면에 전대미문의 전면 철회가 있었다.[13] 넬슨이 타임즈 반대 의제를 가지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타임즈 반대 의제가 없다... 나는 9살 때부터 그것을 읽었다. 나는 원호 리 사건에 대한 그것의 취재에 정확하게 도전했다. 왜냐하면 그 보도는 정확성, 공정성, 공정성의 타임즈 자체의 역사에 대한 배신이었기 때문이다. 어제의 수정의 방어성 이면에는 적어도 더 타임즈의 일부 사람들은 동의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14]
넬슨은 2000년 메릴랜드 베데스다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뉴욕 데일리 뉴스의 모티머 주커만 발행인은 그 뒤 이 신문이 보도와 글쓰기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컬럼비아 대학 언론대학원에서 매년 5,000달러의 상금을 받는 라스-에릭 넬슨상을 제정했다고 발표했다.[9]
선택한 작품
- 브리핑 전화하기: 레이건과 부시, 샘과 헬렌, 대통령과 언론이 함께한 10년 (Columbia 저널리즘 리뷰 1996)
- 클린턴에 이어 (뉴욕 리뷰 오브 북스) 2000)
참조
- ^ Lars-Eric Nelson, 59세, The Daily News (The New York Times)의 칼럼 작가 2000년 11월 22일) [1]
- ^ 라스-에리크 넬슨 (월요일 수요일)
- ^ 라스-에리크 넬슨: 진짜(가브리엘 스나이더) 뉴욕 옵저버. 2000년 11월 26일) [2][dead link]
- ^ https://dangerousminds.net/comments/president_reagan_tells_real_heroes_an_inspiring_story
- ^ https://dangerousminds.net/comments/president_reagan_tells_real_heroes_an_inspiring_story
- ^ (Lars-Eric Nelson, The New York Daily News). 1983년 12월 16일)
- ^ (Lars-Eric Nelson, The New York Daily News). 1983년 12월 28일)
- ^ (Lars-Eric Nelson, The New York Daily News). 1984년 1월 11일)
- ^ a b 라르스-에릭 넬슨 '64: 냉소주의자들 사이에서의 파괴자(컬럼비아 대학교)
- ^ [3]
- ^ FLA. 투표소장은 W. Column (Lars-Eric Nelson, The New York Daily News. 2000년 11월 14일)
- ^ 취재한 원호 리 (뉴스아워 미디어 부대) 2000년 9월 26일)
- ^ "뉴욕 타임즈는 사과한다" (Eric Boehlert, Salon.com, 2000년 9월 27일)[4]
- ^ "신문고백으로 최고의 시대가 아니다" (Lars-Erik Nelson, 2000년 9월 27일)[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