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매드하반
James Madhavan제임스 매드하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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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 의원 | |
재직중 1970–1972 | |
선거구 | 북동바누아레부 |
재직중 1972–1973 | |
성공자 | 사르반 싱 |
선거구 | 사부사부-마쿠아타 이스트 |
입법회의 의원 | |
재직중 1947–1959 | |
선행자 | B. M. 갸네스화르 |
성공자 | 비제이 R.싱 |
선거구 | 동부(인도피지안) |
재직중 1961–1963 | |
선행자 | 비제이 R.싱 |
선거구 | 동부(인도피지안) |
재직중 1963–1966 | |
선거구 | 북부 |
재직중 1966–1970 | |
선거구 | 북동바누아레부 |
집행위원회 위원 | |
재직중 1950–1956, 1964–1966 | |
개인내역 | |
태어난 | 피지 |
죽은 | 1973년 12월 20일 피지 |
정당 | 연방당, 국민연방당 |
배우자 | 유니스 마드하반 |
직업 | 교사, 노동조합원 |
제임스 마드하반 (James Madhavan, 1973년 12월 20일 사망)은 인도-피지아의 정치인이었다.1947년에서 1973년 사이 대부분의 기간 동안 입법회의와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행정회의에서는 두 번의 주문을 받았다.
전기
마드하반은 처음에는 초등학교 교사였으나 라바사에 마하상 사탕수수농민조합이 결성되자 초기 회원 중 한 명이었다.남인도인들의 지원을 주로 받았던 비티 레부와는 달리 라바사의 마하 상은 인도-피지아 공동체의 넓은 단면에서 지원을 받았다.그는 바누아 레부에서 마하상흐의 지도자가 되었고 조직이 두 개의 대립적인 파벌로 분열되자 바누아 레부 농민 연합으로 알려진 새로운 협회를 등록했다.[1]또한 피지교원연맹의 활동적인 회원으로 남아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피지교원연맹 회장을 맡아 1967년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2]
마드하반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입법원에 당선되었으며 1947년 동부 인도-피지아 선거구에서 입법부에 선출되었다.당선된 후, 비슈누 데오에 대항하여 A. D. 파텔과 동맹을 맺었다.파텔이 1950년 선거에서 의원직을 잃었을 때 마드하반은 집행위원회의 인도 대표로 선출되었다.그는 선거구를 바꾼 1959년 선거에서 의원직을 상실할 때까지 입법부에 남아 있었다.그러나 그는 1961년 보궐선거에서 이전 선거구에서 재선된 후 다시 입법위원으로 복귀했다.
그는 파텔, 시디크 코야와 함께 시민연합의 기치 아래 1963년 선거에 출마했다.세 사람 모두 설득력 있게 승리하여 1964년 연방당을 창당하였다.같은 해에 그는 새 집행위원회에 임명되었다.[3]1966년에 재선된 후 그는 부의장으로 임명되었다.[4]
마드하반은 1973년 12월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5]그의 아들 시로마니암도 정치가였다.
참조
- ^ 산업협회와 지역정치
- ^ Mamak, Alexander (1978). Colour Culture & Conflict. Australia: Pergamon Press. pp. 82–83. ISBN 0-08-023353-8.
- ^ 1964년 7월, p10년 7월, 자치정부 태평양 군도를 향한 A(신중한) 발걸음을 내디딘 피지
- ^ 피지의 새로운 반대론 월간 비즈니스 퍼시픽 아일랜드에 도착
- ^ 미스터 제임스 매드하반 퍼시픽 아일랜드 월간지, 1974년 2월 p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