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요시토키

Hōjō Yoshitoki
호조요시토키
北条 義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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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켄
재직중
1205–1224
모나크
쇼군미나모토노사네토모
선행자호조 도키마사
성공자호조 야스토키
제13차 회의 [ja]
재직중
1199–1200
개인내역
태어난1163
죽은(1224-07-01)1224년 7월 1일
배우자히메노마에
이가노카타
아이들.
부모님
  • 호조 도키마사(아버지)
  • 호죠노 마키, 이토 스케치카(어머니)의 딸
서명

호조 요시토키(北朝 yoshoki, 1163년 ~ 1224년 7월 1일)가마쿠라 막부의 제2대 호조식켄(Registent)이며 호조 가문의 우두머리였다. 호조 도키마사와 부인 호조마키의 장남이었다. 1205년 아버지 도키마사의 퇴위로부터 1224년 사망할 때까지의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까지 이른 나이(1163–1183)

호조 요시토키는 1163년에 태어났으며, 호조 도키마사와 그의 부인 호조마키의 장남이다. 출생 당시 호조 마사코라는 누나가 있었다. 그 후 10년 후에는 호조 도키후사라는 또 다른 형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동생이 생기게 되었지만, 그들의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호조 가문은 당시 이즈를 장악하고 있었고, 요시토키 역시 호조인 다이라 가문의 후손이자 황실의 후손이었다.

당시 다이라노 기요모리 휘하의 다이라 일가는 수도 교토에서 세력을 공고히 하고 경쟁자인 미나모토 일족을 추방한 상태였다. 가문의 우두머리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처형되고, 처형되지 않은 아들들은 유배당하거나 수도원에 들어가도록 명령받았다. 폐위된 황제인 고시라카와 천황은 물론, 그의 아들(인형인 니조 천황)도 교토에 있었다. 요시토모의 후계자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호조 도메인이 있던 이즈로 유배되었다. (그의 다른 형제인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미나모토노 노리요리는 교토 부근의 수도원으로 발령받았다.)

요시토키는 생전 첫날부터 이즈에서 호조 가문의 수장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을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형제들, 특히 여동생 마사코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마사코는 말괄량이여서 언니와 어머니보다는 남자들(아버지, 토키마사, 동생 요시토키, 토키후사 등)과 함께 식사하곤 했다.

1179년 요시토키의 여동생 마사코가 젊은 미나모토 유배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반해 결혼했다. 결혼은 젊은 후계자인 요시토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1180년 마사코와 요리토모에게는 외삼촌 요시토코와 매우 친했던 딸 오히메가 있었다. 같은 해, 고시라카와씨의 아들인 불만족스러운 모치히토 왕자는, 타이라의 반쪽이었던 어린 조카 안토쿠 황제가 즉위할 수 있도록 왕위를 거부당했다고 믿고, 타이라 지도부에 싫증을 냈다. 그는 일본 전역에 미나모토 지도자들을 불러 다이라를 타도하도록 했다.

요리토모는 흔쾌히 응했고 요시토키, 마사코, 토키마사, 호조 일족 전체가 그를 지지했다. 그의 이복동생들인 요시쓰네와 노리요리가 합류했다. 요리토모는 사가미 성에 위치한 가마쿠라 이즈 동쪽에 근거지를 만들었다. 겐페이 전쟁이 시작되었고, 요시토키는 아버지로부터 요리토모를 도울 수 있는 어떤 방법으로든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듬해인 1181년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사망하고, 아들 다이라노 무네모리(田林)가 뒤를 이었다.

1182년, 전쟁 중에 19세의 요시토키가 결혼했다. 그의 아내는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1183년에 그들의 첫 아이인 호조 야스토키가 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따라 호조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전년도에 요리토모와 마사코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미나모토의 후계자인 미나모토노 요리에가 된다. 1183년 요리토모의 라이벌이자 사촌인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교토에 들어와 헤이케(그리고 젊은 안토쿠 천황)를 몰아냈다. 요시나카는 그 후 요리토모라는 이름으로 요시쓰네에 의해 교토에서 쫓겨났다. 미나모토는 재빨리 고토바 황제를 옹립했다.

파워로 상승(1185–1205)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미나모토가 다이라를 격파하면서 겐페이 전쟁은 종식되었고, 다이라 지도자의 대부분이 처형되거나 자살하였다(익사한 안토쿠 천황 포함). 미나모토족은 이제 일본을 장악하고 있었고, 가마쿠라( kam川)에 근거지를 세웠다. 이로 인해 호조 또한 매우 강력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 해, 호조 도키마사는 클루루루테른 황제 고시라카와로부터 지토슈고 즉 경관과 관리인의 첫 약속을 받았다.

1192년, 폐위된 황제 고시라카와(그 해 말 사망)는 요리토모에게 쇼군 칭호를 내렸다. 같은 해 마사코와 요리토모에게는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라는 또 다른 아들이 있었다. 요시토키도 1199년 요리토모가 죽은 후, 지금은 매우 강력한 위치에 있었다. 마사코는 수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정치에 관여하고 있었고 요시토코는 후계자가 될 준비를 했다.

호조 도키마사는 호조를 싫어하고, 시아버지인 히키 요시카즈 휘하의 히키 가문을 선호하는 요리토모의 아들 쇼군 요리에의 섭정이 되었다. 요시토키, 마사코, 도키마사는 1200년 섭정협의회를 주재하여 요리에의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을 주었으나, 요리에가 호조를 불신하고, 1203년 요시카즈에게 음모를 꾸며 호조 도키마사를 살해했다. 요시토키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지만 마사코는 이 사실을 알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토키마사는 1203년에 요시카즈에게 처형당했다. 고어 때는 요리에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미나모토노 이치만도 처형되었다. 요리는 지원에서 이탈하여 1203년에 퇴위하고 이즈로 가서 살다가 1204년에 도키마사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 마사코와 요시토키 모두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요리토모의 차남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쇼군이 되었다. 도키마사도 섭정을 하였으나 호조와 함께 낙마하고 도키마사는 그를 처형할 음모를 꾸몄다. 이 시기, 요시토키의 친형인 특정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마사코가 아님)가, 반역죄로 토키마사 부하에게 처형되었다. 요시토키는 그와 친하게 지내다가 아버지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사네토모에게도 처형할 계획이 있을 때 마사코와 요시토키는 아버지에게 퇴위를 명령하거나 반항할 것이다. 토키마사는 머리를 삭발하고 승려가 되어 가마쿠라의 수도원/노네리에 은퇴하여 1215년에야 사망하였다.

호조 요시토키는 이에 따라 도키마사의 뒤를 이어 식켄(유감)으로 삼았다.

섭정과 죽음(1205–1224)

요시토키의 섭정은 그 마지막 몇 년까지 매우 조용하고 사건도 없었다. 누이동생인 '넌쇼군' 마사코의 도움을 받았다. 1218년, 요시토키 리젠트는 마사코를 쿄토로 보내 지금의 클로루테른 고토바 천황에게 자식이 없었으므로,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나가히토 왕자가 쇼군 사네토모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거절당했다.

1219년 쇼군 사네토모가 조카인 고 요리에의 아들에 의해 암살당했고, 후에 스스로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미나모토 선은 소멸했다. 같은 해, 요시토키 리젠트는 멀리 떨어진 미나모토 친척인 쿠조 요리쓰네를 선택했는데, 그는 쿠조 씨로, 따라서 후지와라 씨였다. 신 쇼군이었지만 요시토키는 여전히 섭정이었다.

1221년 조큐 전쟁이 일어났다. 호조에게 환멸을 느낀 클로루트 황제 고토바는 요시토키를 무법자로 선언하고 그를 처형하기를 원했다. 교토는 이제 공개 반란을 일으켰고, 요시토키는 자신의 부대에 교토를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1221년에 도읍을 함락시켰다.[1] 마사코는 그 음모를 알아내는 것을 도왔다. 고토바는 오키 제도로 유배되었다. 요시토키의 아들 호조 야스토키가 수도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24년 호조 요시토키가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61세였다. 쇼군 요리쓰네의 세 번째 시켄으로 아들 겸 후계자인 호조 야스토키가 계승했다. 그의 여동생 마사코는 1년 동안 그를 살아남았고, 1225년에 69세의 나이로 굴복했다.

참고 항목

  • 쇼군의 영주 13명, 요시토키의 삶을 다룬 TV 시리즈.

참조

  1. ^ Sansom, George (1958).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pp. 377–383, 389. ISBN 0804705232.
선행자 호조 리젠트
1205–1224
성공자
선행자 토쿠소
1205–1224
성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