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의 기독교 역사
History of Christianity in Romania루마니아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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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에서 기독교의 역사는 3세기 말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한 로마의 로어 모시아 지방 내에서 시작되었다. 기독교 공동체의 증거는 현대 루마니아 영토에서 3세기와 4세기 사이에 100개가 넘는 고고학적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7세기와 10세기의 원천은 매우 부족해서 이 기간 동안 기독교는 줄어든 것 같다.
로마인 대다수는 정교회에 충실한 반면, 로망스어를 사용하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가톨릭 교회를 따른다. 루마니아어로 기본적인 기독교 용어는 라틴어지만 중세 출처에서는 블락스로 일컬어지는 로마인들이 올드 교회 슬라보닉에서 주례하는 재판관의 채택으로 수많은 남슬라브어 용어를 빌렸다. 15세기에 가장 초기 루마니아어 번역본이 등장했고, 1688년에 처음으로 완전한 성경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다뉴브강 북쪽 로마인 가운데 정교회 계급이 존재했다는 가장 오래된 증거는 1234년의 교황 황소다. 카르파티아 산맥의 동쪽과 남쪽 영토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에큐메니컬 총대주교(Ecumenical General)에 종속된 두 개의 대도시 지도가 14세기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라는 두 개의 주교(主敎)를 건국한 후 설치되었다. 몰다비아의 수도원주의의 성장은 14세기 헤시차스트 부흥과 동유럽의 수도원 전통의 현대적 발전 사이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제공했다. 정통성은 11세기 헝가리 왕국 내에 로마 가톨릭 교구가 세워진 카르파티아 서부의 지역에서만 수 세기 동안 용인되었다. 16세기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탈바꿈한 이들 영토에서는 가톨릭, 칼뱅주의, 루터교, 유니타리아주의 등 4개의 '수신종교'가 특권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합스부르크 제국에 의해 공국이 병합된 후, 지역 정교회 성직자의 일부가 1698년 로마와의 연합을 선언하였다.
루마니아 정교회의 오토체팔리는 왈라키아와 몰다비아가 루마니아로 연합한 지 몇 년이 지난 1885년에 정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정교회와 로마와 연합한 루마니아 교회 연합은 1923년에 국민 교회로 선포되었다. 공산주의 당국은 후자를 폐지했고, 전자는 1948년에 정부에 종속되었다. 통일교회는 1989년 공산당 정권이 붕괴하면서 다시 세워졌다. 지금 루마니아 헌법은 국가로부터의 교회의 자치권을 강조한다.
기독교 이전의 종교
고대 로어 다뉴브 지역에 거주하던 인도유럽 민족인 게태의 종교는 영혼의 불멸에 대한 믿음이 특징이었다.[1][2] 이 종교의 또 다른 주요 특징은 자목시 숭배였다; 자목시 추종자들은 인간의 희생으로 그와 소통했다.[1]
다뉴브강과 흑해 사이의 영토인 현대의 도브루자는 서기 46년에 로마의 모시아 지방에 합병되었다.[3][4] 그리스 신들의 숭배는 정복 후에도 이 지역에 여전히 널리 퍼져 있었다.[5] 근대 바나트, 올테니아, 트란실바니아는 106년 로마의 '다키아 트라이나' 지방으로 탈바꿈했다.[6] 대규모 식민지화 때문에 제국의 다른 지방에서 유래된 컬트들이 다키아로 들어왔다.[7][8] 이 당시 전체 비문 중 약 73%가 그라코로마 신에게 바쳐졌다.[9]
"다키아 트라이아나" 주는 270년대에 해체되었다.[7] 현대 도브루자는 297년 스키티아 마이너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주가 되었다.[7][10][11]
로마 기독교의 기원
다뉴브강 북쪽 로마인 가운데 정교회 계급이 존재했다는 가장 오래된 증거는 1234년의 교황 황소다. 카르파티아 산맥의 동쪽과 남쪽 영토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에큐메니컬 총대주교(Ecumenical General)에 종속된 두 개의 대도시 지도가 14세기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라는 두 개의 주교(主敎)를 건국한 후 설치되었다. 몰다비아의 수도원주의의 성장은 14세기 헤시차스트 부흥과 동유럽의 수도원 전통의 현대적 발전 사이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제공했다. 정통성은 11세기 헝가리 왕국 내에 로마 가톨릭 교구가 세워진 카르파티아 서부의 지역에서만 수 세기 동안 용인되었다. 16세기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탈바꿈한 이들 영토에서는 칼뱅주의, 가톨릭, 루터주의, 유니타리아주의 등 4개의 '수신종교'가 특권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합스부르크 제국에 의해 공국이 병합된 후, 지역 정교회 성직자의 일부가 1698년 로마와의 연합을 선언하였다.
루마니아어의 핵심 종교 어휘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다.[13] 라틴어에서 보존된 기독교 단어로는 보테자("세례"), 파테("Easter"),[14] 프리엇("Priest"),[15] 크루스("크로스")[16][17] 등이 있다. 비세리크("교회", 바실리카에서 온 교회")와 두므주("도미네 데우스에서 온 신")와 같은 일부 단어들은 다른 로망스 언어에서 그들의 동의어와 독립적이다.[10][13][16]
기독교 신앙의 개념을 위한 라틴어 어휘의 루마니아어에 배타적인 존재는 다코-로마 기독교의 고대를 나타낼 수 있다.[18][19] 몇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 제단(ium) – 제단("제단"),
- 세례 – 보테자("세례")
- 칸타레, 칸티쿰 – 칸타레, 칸타레, 칸텍("노래", "노래",
- 크루스, 크루스 – 크루스("크로스"),
- 통신("커뮤니케이션") – 쿠미네카("성찬/성찬을 받거나 주기"),
- 표창장("제물, 헌신") – 성도("제물, 죽은 사람을 기억하거나 기도하기 위해"),
- 크레디트(credere) – 크레디트("믿는")
- 크레덴티아 – 크레덴티("신념, 신념"),
- 크리스천투스 – 크레아틴("크리스찬"),
- draco – draco("dract", "dract"),
- 플로랄리아("완전 축제") – 플로리("Palm Sunday"),
- 이어나레 – ajuna("단식하기"),
- iiunus - ajun("빠른")
- 리가레:
- 카르넴 리가레("타이/바인드 고기") – 까르네레기, 까르네레기("고기를 먹을 수 있을 때 재빠른 재림절 주간")
- 카세움 리가레("타이/시즈 치즈")- 샬레기,
- 루미나리아 – 루마니아어("일반"),
- 렉스, 레지 – 레지("법률, 믿음"),
- 순교자 – 마토르("증인"),
- 기념비적 – 모르몬트("모멘트"),
- 장로 – 장로(preut)(preut)("preot"),
- 파가누스 – păân("pagan"),
- pervigilium, pervigilare – priveghi, priveghea("previghea"),
- 로가레, 로가티오(ne) – 뤼가, 뤼가치네(약) ("기도하기 위해", "기도하기 위해",
- 쿼드라게시마 – 피레시미("Lent"),
- 생투스 – Snt ( ("â)("saint"),
- Scriptura – Scriptura("scriptur, 쓰기"),
- *sufflitus – suflet("신령, 영혼")
- 티미아마 – 티미아에(" (""),
- 투르마 – 투르메아("turma") [18][19]등
기독교 주요 명절의 기독교 종파도 마찬가지다. 크르친("크리스마스") (라틴어:칼라티오(ne) 또는 그 이상의 라틴어: 라크레티오(ne) 및 파스테("에스터") (라틴어:파스채); 때때로 장소 이름의 요소로 발견되는 고풍스럽거나 인기 있는 몇몇 성자 이름들 또한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 같다: 샨티루, 샨티오르츠, 샨티우르, 샨티우르, 샨티우데르, 샨티메드리, 샨티우시. 오늘날 슬라브 태생의 sfnt는 성인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방법이다.[20]
루마니아어는 또한 많은 슬라브 종교 용어들을 채택했다.[17] 예를 들어 duh("소울, 정신"), iad("지옥"), rai("파리"), grijanie("성찬"), pophives("예배"), slujbă("교회 예배"),[17] tainain("미스테리, 성찬")과 같은 단어들은 남슬라브어에서 유래되었다. 심지어 călugar("monk")와 Russali("Whitsuntide")와 같은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일부 용어들도 슬라브어를 통해 루마니아어로 들어갔다. episcop("주교"),arhiepiscop("대주교"),ierarh("고위 성직자"),mitropolit("대주교"), 같은 여러 조건 교회의 위계 조직과 관련된, 중세나 비잔틴 그리스어에서, 남 슬라브 때때로로 반은 intermediate[17][21][22][23][24][25][26]종교적 용어의 A 작은 숫자를 헝가리에서, 인스턴스 mân를 위해 돈 빌린 있었다.tuire(구원)[27]과 pildă ([28]비유)
루마니아에서 기독교의 기원에 관한 몇 가지 이론이 존재한다.[29][30][31] 로마인들이 '다키아 트라이아나'의 주민들로부터 내려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확산이 루마니아 국가의 성립과 일치했음을 암시한다.[13][32] 그들의 조상들의 로마화와 기독교화는 원주민인 다키안과 로마 식민주의자들의 접촉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13][33] 역사학자 이오안 아우렐 팝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현재 루마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영토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먼저 기독교를 채택했다.[34] 그들은 슬라보닉 리투르기가 9세기와 10세기에 이웃한 제1 불가리아 제국과 키예반 러스에 도입되었을 때 슬라보닉 리투르기를 채택했다.[35] 일치된 학설에 따르면 로마인의 조상은 313년 로마 제국 전역에 합법화된 후 다뉴브강(현재의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남쪽 지방의 기독교로 눈을 돌렸다.[36] 그들은 11세기나 12세기에 현대 루마니아 영토로의 이주가 시작되기 전에 제1차 불가리아 제국 동안 슬라보니아 리투르기를 채택했다.[37]
로마 시대
루마니아의 기독교 공동체는 적어도 3세기부터 연대를 한다.[38][39][40] 3세기 초 로마의 히폴리토스가 처음 기록한 구전사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생 앤드류(Scythia)에 의해 '시티아(Scythia)'에서 처음 전파됐다.[29][41] 러시아 정교회가 주장해온 크림반도가 아닌 '사이티아 마이너'를 가리킨다면 루마니아의 기독교는 사도교적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10][29]
다키아 트라이아나에 기독교 공동체의 존재가 논란이 되고 있다.[29][42] 그곳에서 발견된 몇몇 기독교 유물들은 로마가 이 지역에서 철수하기 이전인 3세기부터 유래되었다.[39][40][43] 울피아 트라이아나, 포롤리섬, 포타이사, 아풀룸, 로물라, 게를라 등지에서 십자가, 물고기, 포도 줄기, 기타 기독교의 상징이 새겨진 그릇이 발견되었다. 굿 셰퍼드를 대표하는 보석이 포토이사에서 발견되었다.[39][40][43] 나포카의 장례식 제단에는 십자가의 표식이 원래 이교도의 비문인 'O'자 안에 새겨져 있었고, 후에 기독교화된 이교도의 비문도 암펠럼과 포타이사에서 발견되었다.[39][44] 'EGO SVM FLAGELLVM IOVIS CONTRA PERVersos Christianos(나는 방탕한 기독교인에 대한 목성의 재앙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청록색과 금반지도 발견됐으며 3세기 기독교 박해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40]
스키티아 마이너에서는 3세기와 4세기 초에 디오클레티아 박해 때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했다.[10] 니쿨리젤의 한 암굴에서 4명의 순교자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 암굴의 내벽에는 그들의 이름이 그리스어로 쓰여 있었다.[45] 4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지어진 35개의 바실리카가 그 지방의 주요 마을에서 발견되었다.[46][47] 로어 다뉴브 강 북쪽에 세워진 최초의 바실리카는 수키다바(현 셀레이)에 세워졌는데, 이 곳은 저스틴 1세(527–565)에 재건된 로마 요새 중 하나이다.[48][49] 6세기 동안 칼라티스(현재의 망갈리아), 카피다바, 그리고 스키티아 마이너의 다른 마을들에 매장실이 지어졌다. 벽에는 시편에서 인용한 글귀가 그려져 있었다.[50]
Scytia Minor 출신의 성직자들은 처음 네 번의 Ecumenical Council에서 논의된 신학적 논쟁에 관여했다.[46] 성 브레타니온은 360년대에 아리안주의에 맞서 정교 신앙을 옹호했다.[46][51] 5세기 말까지 14명의 주교들을 감독한 그 지방의 메트로폴리탄 사람들은 그들의 See in Tomis(현대 콘스탄차)를 가지고 있었다.[46] 마지막 메트로폴리탄은 6세기에 언급되었는데, 스키티아 마이너스가 아바스와 스클라베네에게 함락되어 로어 다뉴브강 요새를 파괴했다.[52][53] 존 카시안(360–435), 디오니시오스 엑시구스(470–574), 조앤스 막센티우스(Skythian Monks)는 스키티아 마이너(Skythia Minor)에 살면서 기독교화에 기여했다.[54]
중세 초기
동로마 제국 시대
이전 다키아 트라리아나 지방에서 발견된 4세기에서 6세기까지의 대부분의 기독교 유물들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수입되었다.[56] 슬르베니나 포롤리섬의 기독교 신앙 유적지로 공공 교단이 변모했다는 생각은 고고학자들에게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0][49] 트란실바니아에서 발견된 최초의 기독교 유물 중 하나는 비에르탄에서 발견된 뚫린 청동 비문이었다.[57] 샨타나 데 무레슈-체르냐호프 귀곡촌에 있는 몇 개의 4세기 무덤이 기독교적인 방향으로 정리되었다.[58] 5~6세기 십자가 묘사가 새겨진 점토등도 이곳에서 발견됐다.[44][56]
다키아 트라이아나는 350년경 "타이팔리, 빅투알리, 테르빙기"가 지배했다.[59][60] 서부 고트족을 형성한 테르빙기족의 기독교적 가르침은 3세기에 시작되었다.[61] 일례로 341년 '게티크 땅에서 기독교인의 비숍'으로 봉헌된 울필라스의 조상들은 250년경 카파도키아(터키)에서 포로로 잡혔다.[62] 348년 제1회 고딕도 기독교 박해 때 울필라스는 모시아로 추방되어 그리스어, 라틴어, 고딕어 등을 계속 설교하였다.[63][64][65] 369년에서 372년 사이의 두 번째 박해 동안, 고트 왕 사바스를 포함한 많은 신도들이 순교했다.[66] 고딕 순교자 26명의 유골은 376년 흉노의 침입 이후 로마 제국으로 옮겨졌다.[61][67]
454년 훈닉 제국이 붕괴된 후, 게피드는 "모든 다시아의 범위에 걸쳐 승리자로 군림했다".[68][69] 아파히다의 5세기 무덤에서 나온 금반지에는 십자가가 장식되어 있다.[70] 무덤에서 나온 또 다른 반지에는 "OMHARIVS"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아마도 게피드 왕 중 한 명인 옴하루스를 지칭하는 것일 것이다.[71] 게피딕 왕국은 567–568년에 아바스에 의해 전멸되었다.[72]
'바리안'들 중 기독교인들의 존재는 잘 입증되었다.[73] Theophylact Simocatta는 "기독교 종교에 속했던 적이 한 번 있는" 게피드에 대해 썼다.[73] 스트라테기콘의 저자는 스클라베네인들 사이에서 로마인을 기록했고, 그 로마인들 중 일부는 기독교인일 수도 있다.[73] 이들 기독교인들의 존재와 산문주의는 560년대 카르파티족의 남쪽과 동쪽의 유적지에서 기독교적 상징성을 지닌 유물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설명하기에 이르지 않는다.[74] 그러한 유물들은 보토오차나와 둘체랑카에서 발견되었다.[75] 6세기를 기점으로 동부와 남부의 카르파티아 산맥 주변 공간에서 가슴 십자가를 위한 주형 주형이 발견되었다.[76]
외카르파티아 지방과 발칸 반도
예를 들어 카스텔루에서 카르파티안 남쪽과 동쪽의 8세기 묘지에서 발견된 매장 집단은 지역 공동체가 화장을[77][78] 실천했다는 것을 증명한다.기독교 이전의 관행을 접목한 지역 기독교인들이 죽은 사람들을 화장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추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79][80] 화장은 11세기 초에 인휴먼으로 대체되었다.[77][81]
9세기에서 11세기까지 카파티아 동부에서 온 지역에서는 52개 이상의 기독교 기원 발견이 알려져 있다(수염, 괄호, 펜던트, 땅장식, 기독교 표지가 있는 도자기, 기독교 표지가 있는 고리, 기독교 표지가 있는 고리, 그 중 몇 가지 발견과 내용, 무덤의 방향 등). 지역 주민들이 불가르와 슬라브인들의 기독교화 이전에 기독교의 장례식을 실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82]
로어 다뉴브와 카르파티아 사이의 영토는 9세기 전반까지 제1차 불가리아 제국에 편입되었다.[83] 보리스 1세(852–889)는 863년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불가리아 통치자였다.[84] 그 무렵 기독교의 동양과 서양의 분파간의 차이는 현저하게 커졌다.[85] 보리스 1세는 864년 동양 성직자들의 입국을 허용했고, 불가리아 정교회는 893년 불가리아 문자를 채택했다.[86][87] 943년의 미르체아 보데에 새겨진 글귀는 루마니아에서 키릴 문자를 사용한 가장 초기 사례다.[88]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은 바질 2세 (976–1025) 휘하의 비잔틴에 의해 정복되었다.[89] 그는 곧 콘스탄차에서 스키티아 마이너의 메트로폴리탄 시(Metropolitan See of Scytia Minor)를 부활시켰으나, 이로써 크리스티안 불가리아인들은 오흐리드 대주교의 관할로 들어가게 되었다.[90][91] 모시아의 메트로폴리탄 시(Metropolitan See of Moesia)는 1040년대 비잔틴 제국에 정착한 페체네그인들 사이에서 대량복음화 사명이 파견되면서 드리스트라(현 불가리아 실리스트라)에 다시 세워졌다.[92][93] 드리스트라 메트로폴리탄 시(Metropolitan See of Dristra)는 1260년대에 비시나의 주교에게 인수되었다.[94][95]
1165년 투델라의 벤자민에 의해 그리스 보에티아에 살고 있는 블락스가 거짓 기독교인으로 묘사되었다.[96] 그러나 블락 형제 베드로와 아센은 불가리아와 블락 예언자들을 모아 비잔틴 제국에 대한 반란을 주선하면서 테살로니키의 성 데메트리오스가 적들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교회를 세웠다.[97][98] 불가리아인과 블락스가 반란을 일으켜 제2 불가리아 제국을 만들었다.[99] 불가리아 정교회의 수장은 1204년 "불가리아인과 블락스의 프라임"으로 격상되었다.[99][100]
1070년대부터 로어 다뉴브 북쪽과 카르파티아 동쪽의 영토를 지배해 온 쿠만족의 가톨릭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테우토닉 기사단이, 나중에는 1225년 이후로는 도미니카인이 지휘했다.[101][102] 1228년 '쿠마니아와 브로드닉 땅'의 교황 교구인 에스테르곰의 로버트 대주교가 이 지역에 새 가톨릭 교구를 세웠다.[103][104]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쓴 서한에 따르면 이 교구의 주민들 중 많은 수가 정통 로마인들로 헝가리인과 색슨족 식민주의자들을 그들의 신앙으로 개종시켰다고 한다.[105][106]
내가 들은 바로는 쿠만 주교 블락스(Vlachs) 내에는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한 종교에서 여러 가지 의식과 풍속을 모아 이 이름에 이질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로마교회를 무시한 죄로 그들은 모든 성찬을 그 영토의 교구인 우리의 숭고한 형제인 쿠만 주교로부터가 아니라 그리스 의례의 어떤 사이비 교주로부터 받는다.
카르파티아 내 지역
7세기 이후 트란실바니아에서 기독교의 사물이 사라졌다.[108] 대부분의 지역 묘지에는 이 무렵 화장묘가 있었으나,[109] 9세기 후반이나 10세기 초반의 서동향의 인휴먼 묘지가 시움브루드와 오루지티에서 발견되었다.[110] 이 영토는 896년경 헝가리인들의 침략을 받았다.[111]
줄라로 알려진 헝가리 부족 연방의 2인자는 952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114][115] 줄라는 에큐메니컬 총대주교가 임명한 투르키아(헝가리)의 주교였던 그리스계 히에로테오스가 헝가리에 다시 동행했다.[114][115] 이 시기의 비잔틴 십자가는 무레아 강과 티사 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발견되었다.[116] 알바 이울리아에서 온 청동 십자가와 10세기 도바카에서 온 비잔틴 펙탈 십자가가 트란실바니아에서 발견되었다.[108] 또한 1002년경 그리스 의례에 따라 세례를 받은 아첨이라는 족장에 의해 세나드에 그리스 수도원이 세워졌다.[117][118]
줄라의 영토는 아첨의 영토와 함께 스테판 1세 휘하에 헝가리의 왕국으로 편입되어 라틴의 의례에 따라 세례를 받았다.[119] 스티븐 1세는 농산물에 대해 평가한 교회세인 십일조를 소개했다.[120][121] 로마 가톨릭 알바 율리아 대교구, 로마 가톨릭 세제드-카나드 교구, 로마 가톨릭 오라데아 마레 교구는 루마니아 최초의 로마 가톨릭 교구로 헝가리 칼록사 대주교의 참모가 되었다.[122] 시비우의 단서는 1212년 지역 색슨족의 요청에 따라 에스테르곰 대주교(헝가리)의 관할로 이관되었다.[123]
교회 관계자들이 교회 묘지 장례를 고집한 뒤 교회 주변으로 대형 묘지가 발달했다.[124][125] 트란실바니아에 있는 최초의 베네딕트 수도원은 11세기 후반에 클루즈-마네슈투르에 세워졌다.[126] 다음 몇 세기 동안 알마슈, 헤리나, 므니슈스티레니, 메세슈에 새로운 수도원이 설립되었다.[127][128] 13세기 초 Carrța에 있는 Cistercian 사원이 설립되었을 때, 그것의 소유지는 Vlachs에 속하는 땅에 만들어졌다.[127] 11세기 들어 동양교회와 서양교회의 적개심도 커졌다.[129]
중세
카르파티아 내 정교회
부다 평의회는 1279년 동방교회의 교회 설립을 금지했지만 13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시기에 수많은 정교회가 세워졌다.[131][132][133] 이 교회들은 주로 목재로 만들어졌지만, 일부 지주들은 그들의 사유지에 돌로 된 교회를 세웠다.[131] 이 교회들의 대부분은 그리스 십자가의 계획에 따라 지어졌다. 일부 교회들은 로마네스크나 고딕 건축의 요소들을 전시하기도 한다.[131][133] 많은 교회들은 교회 설립자들을 묘사하는 봉헌적인 초상화로 그려졌다.[133]
지방 정교회 계층은 종종 14세기 후반까지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메트로폴리탄 세스의 관할하에 있었다.[135] 예를 들어, 왈라키아 메트로폴리탄도 1401년에 "모든 헝가리와 국경지역의 국가"라고 자칭했다.[135][136] șchei Brașovului를 포함한 루마니아의 정통 수도원은 슬라브어 문자의 중심지였다.[137] 성경은 15세기 마라무레아의 승려들에 의해 처음으로 루마니아어로 번역되었다.[138]
1356년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헝가리 도미니카 훈장 이전의 황소에게 "이단자인 트란실바니아, 보스니아, 슬라보니아의 모든 주민에 반대한다"(트란스 트란실바노스, 보스니아 엣 스클라보니, 여기 조용하다)고 지시받았다.[139]
1366년 쿠빈과 카라에서 동방 정교회 사제들의 체포를 명령한 헝가리의 루이 1세 치하에서 정교회 기독교인들의 처우가 악화되었다.[140] 그는 또한 하예그, 카렌세베슈, 메하디아에 "로마교회의 신앙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자만이 재산을 소유하고 소유할 수 있다"고 결의했다.[141] 그러나 이 시기에는 개종이 드물었다; 알베르나의 프란치스코 바르톨로뮤는 1379년 "어떤 어리석고 무관심한 사람들"이 "슬라브족과 로마인"의 개종을 반대한다고 불평했다.[142] 로마인과 천주교 지주 모두 이 명령에 반대했다.[142][143] 가톨릭 귀족과 주교들의 사유지에 세워진 루마니아 성당과 돌로 된 교회들은 14세기 후반부터 문서로 자주 언급되었다.[131]
교황이 후스파에 대항하여 보낸 특별 조사관도 1436년에 "스파이즘"에 대해 강제적인 조치를 취했다.[144] 1439년 피렌체 평의회에서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가 연합한 데 이어 현지 루마니아 교회는 로마와 연합한 것으로 간주되었다.[145][146] 카파의 요한 등 교회 연합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투옥되었다.[135]
군주들은 남부 국경 지역에 사는 로마인의 개종만을 주장했지만, 15세기에 많은 루마니아 귀족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142][147] 트랜실베이니아 당국은 16세기 후반 로마인을 칼뱅주의로 개종시키기 위해 조직적인 노력을 기울였고,[148] 1566년 '진정한 신앙'으로 개종하지 않은 사제들에 대한 추방 명령이 내려졌다.[149] 1571년 몰다비아 수도사 에프티미가 정교회 주교로 임명되면서 비로소 스테판 바토리 휘하에서 정교회 계급이 회복되었다.[149][150]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정교회
한 무명의 이탈리아 지리학자가 14세기 초 로마인과 블락스를 이교도라고 잘못 묘사했다.[152] 예를 들어 카르파티아와 로어 다뉴브 사이의 영토에서 왈라치아의 독립을 이룬 루마니아의 통치자 바사랍 1세(c. 1310–1352)는 1332년의 왕립 졸업장에 의해 정교회를 지칭하는 '스시즘적'으로 언급되었다.[153][154] 왈라키아 메트로폴리탄 시(Metropolitan See of Wallachia)는 1359년[155] 에큐메니컬 총대주교가 비시나의 마지막 대도시인 히아킨토스를 지방 정교회를 이끌도록 지정하면서 설립되었다.[156] 올테니아를 관할하는 제2의 메트로폴리탄 시(Metropolitan See)가 1370년 세베린(현재의 드로베타 투르누 세베린)에 설치되었지만 1403년경 이후 공국에는 메트로폴리탄 한 곳만이 다시 있었다.[156][157][158] 지방교회는 라두 4세 (1496년–1508년)에 의해 두 개의 질척한 주교를 세운 전 에큐메니컬 총대주교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네폰 2세 총대주교에 의해 재편성되었다.[157][159]
제2의 공국 몰다비아는 보그단 1세(1359년 – c. 1365) 휘하의 카르파티아 동쪽에 있는 영토에서 독립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할리치(우크라이나)의 정교회 위계층의 관할하에 남아 있었다.[160][161] 1386년 할리히 메트로폴리탄은 몰다비아의 주교 두 명을 성결시켰지만 에큐메니컬 총대주교는 이에 반대했다.[162] 총대주교는 1394년 몰다비아를 위해 별도의 대도시권을 설립하였으나, 몰다비아의 스테판 1세(1394–1399)에 의해 그의 임명권자가 거절당했다.[157][162] 분쟁은 1401년 총대주교가 왕족 일원을 대도시로 인정하면서 해결되었다.[163] 몰다비아에서는 1408년과 1471년에 로마어로 된 두 개의 서프라간 주교와 Rădăuți가 처음으로 기록되었다.[157][159]
14세기 후반부터 루마니아 왕자들은 아토스 산(그리스)의 수도원을 후원하였다.[165] 먼저, 쿠틀루무시우 수도원은 왈라키아 (1352–1364)의 니콜라스 알렉산더로부터 기부금을 받았다.[166] 왈라키아에서는 1372년 세르비아 출신의 니콜데무스 스님이 아토스 산의 칠란다르에서 수도원을 받아들임으로써 보다샤의 수도원이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