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앨버트 하퍼
Henry Albert Harper헨리 앨버트 하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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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 1873년 12월 9일 |
죽은 | 1901년 12월 6일 | (27세)
국적 | 캐나다인 |
모교 | 토론토의 대학교 |
직업 | 언론인, 공무원 |
헨리 알버트 하퍼(Henry Albert Harper, 1873년 12월 9일 ~ 1901년 12월 6일)는 캐나다의 언론인이자 공무원이었다. 그는 미래의 수상 윌리엄 라이온 매켄지 킹의 친구로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하퍼는 익사로부터 누군가를 구하려다 사망한 후 국회의사당에 있는 동상에 의해 기념되고 있다.
온타리오 주 쿡스타운에서 헨리와 마가렛 앤 하퍼 사이에서 태어난 하퍼는 1880년 가족과 함께 배리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11년 후 배리 센트럴 콜리지아테 연구소를 졸업했다. 그는 토론토 대학을 다녔고, 그곳에서 동료 학생이었던 매켄지 킹과 친구가 되었다. 1895년 정치학 명예학위를 마친 후, 하퍼는 런던과 토론토에서 기자가 되었고, 마침내 몬트리올 데일리 헤럴드의 오타와 특파원이 되었다.
오타와에서 하퍼는 매켄지 킹과 아파트를 공유했는데, 매켄지 킹은 당시 윌프리드 로리에 정부 하에서 새로운 노동부 설립을 위한 노력을 주도하고 있었다. 1900년 하퍼는 헤럴드에서 사임하여 매켄지 킹을 위해 노동부의 주요 출판물인 노동 가제트의 부편집장으로 일했다.
1901년 12월 6일, 하퍼는 미토 백작 총독이 얼어붙은 오타와 강에서 개최한 스케이트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다. 앤드류 조지 블레어의 딸인 베시 블레어와 알렉스 크렐먼은 약한 얼음 덩어리를 뚫고 떨어졌다. 크레엘만이 몸을 안전하게 하는 동안, 하퍼는 블레어를 구하기 위해 강으로 뛰어들었고, 결국 둘 다 익사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구조 시도를 만류한 동료들에 대한 답례로 "내가 또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고, 또 다른 전언은 물에 뛰어들기 전에 갈라하드의 유명한 "나를 잃으면 나 자신을 구한다"는 말을 인용했다고 한다.[1] 그들의 시신은 다음날 수습되었고 하퍼는 12월 9일 쿡스타운에 묻혔다.
맥켄지 킹은 친구의 죽음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그의 희생을 기릴 방법을 찾는 책임을 지는 정부 위원회의 수장이 되기로 계획했다. 매켄지 킹과 하퍼 모두 테니슨의 아서니시 작품들을 좋아했고, 매켄지 킹은 의회 건물 밖에 있는 갈라하드 경의 동상으로 하퍼에게 영광을 돌리기로 결정했으며, 인용문은 돌기슭에 베였다. 조각가 어니스트 와이즈 키저가 의뢰를 받아 1905년 동상이 공개되었다.[1] 그것은 국회의사당 힐의 정문 바로 앞에 있는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 중 하나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것은 정치인이나 군주를 묘사하지 않는 유일한 동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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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매켄지 킹은 일기장에서 "내가 사랑했던 그 어떤 남자도 사랑하지 않았던 그 남자, 나의 아버지와 오빠만 빼고"라고 회상했던 그의 친구에 대한 영웅주의의 비밀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1909년 하원에 앞서 킹 목사가 처음으로 한 연설은 하퍼의 희생 8주년을 기념해 백장미 열 송이를 동상 밑바닥에 올려놓았다는 진술이 선행됐다.
그의 일기, 메모, 킹과의 서신은 캐나다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2]
헨리 하퍼는 쿡스타운에서 남쪽으로 약 2마일 떨어진 윌슨스 힐에 있는 올드 장로교 묘지에 있는 하퍼 가족 플롯에 묻혔다. 성에는 그의 추모 명판이 있다. 온타리오주 배리에 있는 앤드류 장로교회
참조
- ^ a b 휘태커, 무리엘. 아서왕의 전설은 예술이다. 케임브리지: D.S. Brewer, 1990. ISBN0-85991-486-0
- ^ http://www.cain-rcia.ca/cain-bin/cainMain/ItemDisplay?sessionKey=1030035271006_142_13_29_85&l=0&lvl=2&v=0&coll=1&itm=185111&rt=1&bill=1[영구적 데드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