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에츠
Goniądz고니에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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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에쓰의 버드 | |
좌표: 53°29′21″N 22°44′16″E / 53.48917°N 22.73778°E좌표: 53°29′21″N 22°44′16″E / 53.48917°N 22.73778°E | |
나라 | |
무성음속 | 포들라스키 |
카운티 | 모히키 |
지미나 | 고니에츠 |
면적 | |
• 합계 | 4.28km2(1.65 sq mi) |
인구 (2006) | |
• 합계 | 1,910 |
• 밀도 | 450/km2(1,200/sq mi) |
우편번호 | 19-110 |
웹사이트 | http://www.goniadz.pl/ |
Goniądz ([ˈɡɲɲɔnt͡s]; 리투아니아어: 고니온다스, 독일어: 고니온즈(Gonionds)는 폴란드 북동부의 포드라스키 보이보데프(Podlaskie Voivodeship)에 있는 모우키 군(모우키 군) 비브르자 강(pop.1915)에 위치한 폴란드의 마을이다. 그 도시의 80%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파괴되었다. 전후 재건 이후 관광지는 물론 지역 농업 중심지가 되었다.
역사
그 마을은 그 당시 그 지역을 덮고 있는 울창한 숲에서 14세기에 세워졌다. 첫 언급은 1358년 8월 14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때 고니에드즈를 위즈나 땅 안에 있는 화우의 자리로 언급했다. 1382년 12월 2일, 마조비아의 둑들(시모위트 4세와 그의 동생이자 공동정거인 야누스 1세)은 주변 땅과 함께 위즈나 성을 테우토닉 질서에 수여했다. 이 땅은 1402년 테우톤족으로부터 되사받았으나, 동시에 주문은 리투아니아 공작에게 팔았다. 그 때문에 이 마을은 폴란드 왕국, 마조비아의 두치, 리투아니아의 그랜드 두치 양쪽에 의해 분쟁을 겪게 되었고, 후자 주가 잠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연이은 결과, 이 마을은 국경 양쪽의 귀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국경지대로, 양쪽 주의 법이 적용되었다. 1430년 리투아니아 비토타스의 공작은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 이 마을의 다른 주인들도 이 작은 성을 확장했는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미하와 글리우스키 왕자, 미코와이 2세, 폴란드의 미래 왕인 시기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였다. 1547년 고니에프츠는 켐법을 본떠 만든 시헌장을 수여받았다. 4년 후, 시기문트 아우구스투스 왕은 고니에드즈를 둘러싼 땅에는 폴란드 법만 적용하기로 결정했고 마침내 1569년 이 도시는 폴란드에 합병되어 오늘날까지 국경 안에 남아 있었다.
1572년 고니에즈(Goniądz)는 크니신(Knyszyn)의 항성선(starostship)의 일부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폴란드 의회가 도시 헌장을 확정했다. 그 마을은 계속해서 빠르게 성장했고 1579년 당시 가장 비싼 광물 중 하나인 소금과의 거래권을 부여받았다. 1621년 5월 28일 거대한 화재로 마을이 파괴되었으나, 빠르게 재건되어 1667년에 이르러 지방 행정의 자리가 되었다. 1765년까지 그 마을에는 243채의 집과 대략 1500명의 거주자가 있었는데, 대부분은 폴란드인이었지만 유태인과 타타르인들도 있었다. 1775년 프르제밀 안토니 베타벤스키의 주교에 의해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다.
제2차 세계 대전
독일인들은 1939년 9월 10일 동안 이 마을을 점령하고 소련군에 이 도시를 넘겨주기 전에 회당을 불태웠다. 이 마을은 1941년 6월 26일 독일군에 의해 다시 점령되었고, 지역 신부와 상의한 후, 얀 발로노프스키가 이끄는 협력주의 마을 협의회를 임명했다.[1] 1941년 6월 29일 폴란드 경찰은 공산주의자로 지목된 유대인 30여 명을 고문했다. 1941년 7월 2일, 몇몇 유대인들이 주변 마을에 숨어 있는 것이 발견되자 마을 의회는 "근처 마을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은 마을로 돌아가도록 명령한다. 유대인을 숨겨둔 채 붙잡힌 농부들은 모두 유대인과 함께 총살될 것이다."[2] 7월 4일, SS 부대가 마을에 도착하여 유대인들을 모아 모욕을 주었고 떠나기 전에 폴란드 당국에 공산주의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에 대해 자유로운 조치를 취했다. 어떤 죄수들은 대가를 받고 풀려났지만 다른 죄수들은 고문당하거나 구타당해 죽기도 했다. 생존자들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20명에서 180명 사이 에서 다양하다. (주로 유태인, 일부 폴란드인) 1941년 7월 6일, 다섯 명의 유대인 젊은이들이 도시 밖에서 폴란드 경찰에 붙잡힌 후 독일 군인들에게 살해되었다. 1941년 7월 20일~21일, 아마도 소규모 SS 부대가 감독했을 폴란드 경찰은 20명의 유대인이 살해된 포그롬을 선동했다. 포그롬에 이어 추가 폭력으로 위협하자 오소위크 독일군 사령부에 징집된 유대인 여성들은 현지 독일 대령의 도움을 호소했다. 대령은 독일 헌병대를 급파해 유대인의 재산을 훔친 죄로 가해자 6명을 체포해 처형했다.[1]
폴란드와 그 후 독일 당국의 폐쇄적인 게토 설치 시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뇌물을 받은 후 이것은 실행되지 않았다.[full citation needed] 14명의 유대인은 1941년 8월 폴란드 경찰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추정되는 용의자로 체포되어 SS에 의해 처형되었다. 유대인들은 많은 베흐마흐트 기업에서 강제 노동에 이용되었다. 1942년 11월 2일 SS는 대부분의 유대인 주민들을 보거스 마을에 있는 중계소로 몰아냈다. 그곳에서 그들은 트레블링카 말살캠프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졌고 그들 대부분은 도착하자마자 살해당했고, 10명의 고니에드츠 유대인들은 말살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또 다른 10명은 고니아드즈 근처에 숨어 살았다. 1944년 5월 독일인들은 3명의 유대인과 그들을 보호하던 폴란드인 부부를 체포하여 사살했다.[1] 1949년 7월 7일 25명의 유대인을 살해한 혐의로 10여명의 폴란드 협력자들이 함께 재판을 받았다. 한 명은 종신형을, 다른 한 명은 6년 임기를 받았다.[1][2] 1950년에 폴란드 협력자가 다른 사건으로 6년 형을 받았다.[1]
참조
- ^ a b c d e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 캠프와 게토스 백과사전, 1933–1945, 제프리 P. 메가지, 마틴 C 딘, 그리고 멜 헤커, 제2권 885-886쪽.
- ^ a b Bender, Sara (2013). "Not Only in Jedwabne: Accounts of the Annihilation of the Jewish Shtetlach in North-eastern Poland in the Summer of 1941". Holocaust Studies. 19 (1): 1–38. doi:10.1080/17504902.2013.11087369.
외부 링크
위키미디어 커먼스의 고니에즈 관련 미디어
- http://www.jewishgen.org/Yizkor/goniadz/goniadz.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