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빈첸초 카라파
Gianvincenzo Carafa잔빈첸초 카라파(1477–1541)는 이탈리아의 로마 가톨릭 주교 겸 추기경이었다.
전기
카라파 가문의 델라 스타데라 지부 소속인 지안빈첸초 카라파는 1477년 나폴리에서 파브리치오 카라파의 아들로 토레 델 그레코의 간판, 오렐리아 톨로메이 등의 이름으로 태어났다.[1]
경력 초창기에 나폴리 대성당 성당 지부의 집사가 되었다.[1]
1497년 9월 13일 그는 리미니 주교로 선출되었다.[1] 그는 27세가 될 때까지 교구의 행정관이었다. 그는 1504년 4월 1일에 주교로 승격되었고, 아직 성년에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한 허가를 받았다.[1] 그는 1530년 6월 24일까지 그 판을 점령했고, 그 때 조카 프란체스코 카라파의 손을 들어 사임했다.[1]
제5차 라테란 평의회(1512–17)에 참가하였다.[1]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그를 추기경으로 만들고 싶었으나 당시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고 있던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는 네이폴리탄의 승진에 반대하였다.[1] 교황 레오 10세는 그를 교황의 보좌관으로 임명했다.[1] 1521년 12월 2일, 교황 레오 10세의 사망에 따른 세데 공석 기간 동안, 추기경대학은 그를 로마의 주지사로 선출했다; 그는 1522년 교황 아드리안 6세가 선출될 때까지 이 자리를 차지했다.[1]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27년 11월 21일에 그를 추기경 성직자로 임명했다.[1] 그는 1528년 4월 27일 산타 푸덴치아나의 붉은 모자와 적정 교회를 받았다.[1]
그는 1528년 8월 31일부터 1536년 9월 6일까지 앙글로나 시문의 관리자로 있다가 조카 올리베리오 카라파의 손을 들어 사임했다.[1] 그는 1533년 1월 8일부터 1534년 1월 9일까지 신성한 추기경 대학의 카메룬고였다.[1]
그는 교황 바오로 3세를 선출한 1534년 교황 콘클라베에 참가했다.[1]
1535년 7월 26일부터 1539년 4월 21일까지 그는 아케라 시문의 행정관이었다.[1] 그는 1537년 7월 23일 산타 프리스카 교회를, 1537년 11월 28일 트라스테베리아의 산타 마리아 교회를 선택했다.[1] 1539년 8월 4일, 그는 추기경들의 순서를 선택했고, 팔레스트리나의 교외지경을 받았다.[1] 교황 바오로 3세가 비첸사에 갔을 때, 카라파 추기경은 로마에서 라떼르를 섭외하고 있었다.[1]
1541년 8월 28일 나폴리에서 사망했으며 나폴리 성당에 안장되어 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