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1세 벤티밀리아
Francesco I Ventimiglia프란체스코 1세 벤티밀리아 (1285년-1338년 1월 2일)는 이탈리아의 귀족이자 정치인이다.그는 제라시 백작의 칭호를 물려받았다.
전기
시칠리아의 벤티밀리아는 추정적으로 이탈리아의 베렝가리오 2세의 후손인 프랑크나 롬바르드 가문에서 유래했으며,[1] 1180년 지부가 시칠리아로 이주할 때까지 벤티밀리아(리가리아)의 백국을 통치했다.
프란체스코는 그의 아버지 엔리코 2세로부터 제라치 백작의 칭호를 물려받았다.1315년, 그는 모디카 백작 만프레디의 딸 코스타나 키아라몬테 모스카와 결혼했다.하지만 10년 뒤 그는 아내가 불임이라고 부인했다.그는 안티오키아 가문의 귀족인 카피지 백작과 재혼했다.하지만, 키아라몬테 가문과의 불화는 그의 궁극적인 몰락의 원인이 될 것이다.
프란체스코는 아비뇽의 교황 궁정 대사로서 시칠리아의 프레데리크 3세를 섬겼다.그는 마르세유에서 앙주군을 위해 싸웠다.1318년, 그는 아라곤의 제임스 2세와 평화를 협상하는 임무를 수행했다.1336-1337년, 그는 잠시 프레데릭 왕을 수행하며 체임벌린이나 장관직을 수행했지만, 프레데릭이 사망하자, 아라곤의 페터 2세는 팔리지와 키아라몬테 가문을 선호했다.프란체스코의 아들과 그의 비서는 팔레르모에 있는 왕의 궁정에 사명을 띠고 수감되었고, 비서는 프란체스코와 페데리코 안티오키아가 피터 [2]왕에 대한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 고문을 당했다.
왕과 키아라몬테를 포함한 그의 동맹군은 벤티밀리아가 물러난 제라치 성을 포위했다.그의 죽음에 대한 사실들은 불분명하지만, 전설에 따르면 그는 그의 무기를 가지고 도망치려다가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3][4]고드라노의 영주 프란체스코 디 발게르네라의 칼에 찔렸다고 한다.그의 재산은 몰수되었지만 1354년에 그의 두 자녀에게 돌아갔다.프란체스코는 제라시 시쿨로의 산 [5]바르톨로메오 교회에 묻혔다.
레퍼런스
- ^ Berardo Candida Gonzaga (1875)에 의한 Memie delle famigli nobili delle delli d'Italia, 1-2권, 197쪽.
- ^ Berardo Candida Gonzaga; 201쪽
- ^ Teatro genologico delle Familie.. de regni Sicilia, Filadelfo Mugnos, Messina, 1671쪽, 476쪽.
- ^ 델라 스토리아 디 시칠리아, 프란체스코 마우롤리코 원장, 지롤라모 디 마르조 페로, 에티엔 발루제, 자코모 롱고, 1849년 270쪽.
- ^ 이탈리아어 위키피디아에서 많은 것을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