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리바스 전투
First Battle of Rivas제1차 리바스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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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 전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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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성 | |||||||
니카라과 반군(자유) 팔랑게 필리버스터 군 | 니카라과 국군 정통파 정당 | ||||||
지휘관과 지도자 | |||||||
프란시스코 카스텔론 윌리엄 워커 아킬레스 케웬 † 티모시 크로커 † | 마누엘 아겔로 대령 | ||||||
힘 | |||||||
≈45 필리버스터즈 ≈ 100명의 원주민(동작) | ≈500-580명 | ||||||
사상자 및 손실 | |||||||
11명 사망(전투 중 6명 사망, 그 여파로 5명 부상)[1] 부상자 7명 | 70명 사망 +70 부상자 |
제1차 리바스 전투는 1855년 6월 니카라과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카스텔론 장군의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지지하여 1855년 6월 용병 소군을 이끌고 니카라과에 도착한 미국인 필리버스터, 모험가, 용병 윌리엄 워커에 저항하기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1855년 6월 29일 일어났다.그의 군대는 국지적인 지원으로 왕당(아리스토크라테스)을 물리치고 니카라과 내전을 종결시킬 수 있었다.
배경
당시 니카라과 중미 공화국에서는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자유당(민주당)과 왕립당(아리스토크라테스)은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려다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었다."6년의 기간 동안 니카라과는 15명 이상의 대통령이 없었다."[2]워커는 처음 팔랑게(필리버스터 용병/어드벤쳐 군대)와 함께 도착했을 때, 이 벤처를 힘의 과시라고 제안했다.
전투
"콜로넬" 워커는 그의 지휘 아래 소총과 권총으로 완전히 무장한 약 45명의 필리버스터와 약 100명의 원주민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두 무리는 필리버스터를 앞세우고, 탄약과 보급포를 가운데 두고, 원주민들이 후방을 들고 행진하는 대열로 정렬되어 있었다.마을에서 반 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서 그는 상급 장교들을 만나 계획을 알렸다.워커의 두 '캡틴'은 시내로 진출하여 거리에서 왕실주의자들을 몰아내고, 원주민들은 그들의 뒤와 옆구리를 보호하기 위해 뒤를 바짝 따라붙는 것이었다.
미국인들은 이 첫 충돌에서 대부분의 사상자를 흡수하면서 오후 12시경에 도시로 진격했다.[3]그들은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길의 일부를 멈추고, 재장전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추가적인 조치를 기대했다.그러나 전투로부터 아직 어느 정도 떨어진 원주민들은 대규모의 영국군 부대에 의해 교전되었고, 워커의 부대가 파괴될 것으로 믿고 있던 민주당 지도자는 리바스에서 후퇴했다.워커와 그의 부하들은 여전히 작은 집밭에 갇혀 있는 반면, 총으로 왕실 세력은 그들 혼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통파 세력은 필리버스터를 집에서 쫒아내기 위해 작은 대포를 끄집어내려고 시도했으나 용병들에 의한 샐리에서는 무력화되었다.그리고 나서 왕실주의자들은 필리버스터를 집 밖으로 태워버리려고 시도했고, 불을 지르는 데 성공했다.이때 4시간의 전투 끝에 퇴각 명령이 워커의 부름을 받았다.집 밖으로 처음 나온 사람들은 그들과 가장 가까운 니카라과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나머지 왕실 세력은 미국의 진전에 순간적으로 아연실색했다.혼란의 결과, 필리버스터들은 단 한 명의 사망률만 더하면 철수할 수 있었다.
여파
워커는 더 가까운 지역으로 철수했고, 그의 군대는 수백 명의 필리버스터와 원주민들에 의해 증강되었다.여러 소식통에 따르면 워커와 그의 부하들은 전국민들에게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혔고, 그들은 전투의 여파로 도시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워커는 그 도시를 정복했다.
참조
- ^ 니카라과의 전쟁:윌리엄 워커의 니카라과 컬러 지도와 함께
- ^ Lisa Tirmenstein (17 May 2000). "Costa Rica in 1856: Defeating William Walker While Creating a National Identity". Retrieved 3 April 2008.[출처?]
- ^ 니카라과에서 워커와 함께:또는 제임스 카슨 제이미슨의 미국 파랑지 장교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