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이즈

Cui Zhi

추이쯔(崔崔, 772년 – 829년[1][2] 3월 2일)는 중국 당나라관리무종황제재상을 지냈다. 그와 그의 사촌인 추이링(崔崔)은 모두 황하 북쪽에 있는 회선들에 대한 당제국 정부의 통제력을 잃게 만든 정책 실책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

배경

추이는 772년 다이종황제 때 태어났다. 아버지 추이잉푸(崔崔甫, 안후이차오후( in lu, magistrate廬, 현대 차오후)는 루장 현 군수를 지냈으며, 관직 추이유푸의 동생으로, 다이종 황제의 아들 데종 초기에는 결국 재상을 지냈다. 780년 추이유후가 아들 없이 죽자 추이지를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추이지는 추이유후 선에 채택되었다. 추이지는 유교 고전과 역사, 특히 아이칭에 대해 학구적이라고 한다.[3]

시안종 때

818년 현재, 데종황제의 손자 시안종황제추이지는 황실 수행원(給中中)으로 활동 중이었는데, 이때 추이지는 그를 위해 추가 수입을 찾아 시안종황제를 기쁘게 한 것으로 알려진 황후보 재상이 관리들의 봉급을 삭감하자고 제안했다. 시안종황제가 그런 취지의 칙령을 내리자, 추이는 지시중처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 칙령을 봉하고 시안종황제에게 돌려주었고, 그 제안이 왜 서투른 것인지에 대해 장황하게 다투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쿠이의 반대로 시안종황제는 그 제안을 포기했다.[4] 쿠이는 곧 황실 검열관 부관(中中中官)[3]이 되었다.

무종 때

820년, 시안종황제가 연초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무종황제가 계승한 후, 추이는 중슈 실랑(中shu郎, 중슈 현)으로, 정부 입법국 부국(中中 zhong國, 중슈 현), 사실상의 재상으로 통중슈 멘샤 핑장시(中中中xia市)라는 칭호를 얻었다.[5]

821년, 오랫동안 제국 정부로부터 사실상 독립된 방식으로 회로가 지배되어 왔던 룰롱 서킷(北京, 베이징에 본사를 둔)의 군사 주지사(지두시) 류종이 사임하고 회로에 대한 통제를 제국 정부에 양도하겠다고 제의했다. 서킷 사람들이 제국 통치에 복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류는 서킷을 세 회로로 나누어 장홍징 전 총통, 서핑 장군, 루 시메이(西 sh) 관료를 추천하고, 주커롱 등 여러 장교들을 파견하여 서킷을 장악하도록 했다. 수도 장안에게 조정하기 어려운 것을 발견하여, 뤄룽의 군사들이 그 예에 의해 황실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격려하도록 그들에게 위임과 예우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무종황제는 류의 제출을 받아들였으나 류의 칸막이 계획을 완전히 이행하지 않았다. 루의 현은 두 개로 나누어 주었으나, 쿠이와 동료 재상 두위안잉의 제안으로 나머지 현은 모두 장에게 주어졌다. 그는 류의 계획의 근거를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주씨 등은 류씨가 장안으로 보낸 장교들은 사무실이나 월급을 주지 않았으며, 수입이 부족하여 추이, 두씨 등에게 사무실 요청을 자주 제출함에도 불구하고 식량과 의복에 대한 대출까지 요구하는 등 재정적인 절박감에 빠졌다고 한다. 장문휴는 뤄룽에 도착하자 주씨와 다른 사람들에게 뤄룽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여 그들을 더욱 화나게 했다.[5] 821년 가을, 룰롱 군인들이 돌연 변이를 일으켜 장군과 루를 체포하여 주군을 지도자로 받들었다.[6]

한편, 당시 재정부장이었던 추이지의 사촌인 추이링( c ling, 현대 허베이성 시자좡에 본사를 둔 청데 서킷)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청드는 뤼룽과 마찬가지로 시안종황제의 오랜 선거운동으로 인해 황제가 굴복할 때까지 제국 정부로부터 사실상 독립적으로 오랫동안 통치되어 왔다.[7] 무종황제는 820년 서킷의 군수를 지낸 왕청종이 마지막으로 서킷의 군수를 지낸 후 이웃 웨이보 서킷(西 circuit, 허베이한단 본점)의 군수를 톈홍정(天洪 made)[5]으로 삼았다. 톈은 몇 년 동안 청드군과 싸웠기 때문에 청드 병사들이 자신을 깊이 원망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웨이보 병사 2천 명을 데리고 청드로 갔다. 그는 군인들에게 지불할 재정 명세서를 요청했다. 그러나 추잉은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지 못한 채 톈이 청데 부대를 지휘한 것을 볼 때 청데 부대는 그를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믿었고, 따라서 웨이보 병사들의 유출을 허락하는 데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 톈안먼이 4건의 탄원서를 제출했으나 소용이 없어지자 웨이보 부대를 다시 웨이보에 복귀시킬 수밖에 없었다. 뤄룽의 반란이 일어난 직후인 821년 가을, 청드 병사들은 왕팅쿠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켜 톈을 죽였다. 그 뒤 황군이 뤄룽과 청드군을 물리칠 수 없게 되자 무종황제는 주와 왕을 군수로 임명하게 되어 뤄룽과 청드(그리고 그 직후 웨이보)의 효과적인 손실로 이어졌다.[6]

당시 민심이 황하 북방 지역의 패배를 추이지와 추이링의 탓으로 돌리자 추이지는 당황했다.[8] 총리직에서 해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법무부 장관(刑部尚書, 싱부상슈)이 되었다.[6] 그는 곧 에우에 서킷( (岳, 후베이우한에 본사를 두고 있다)의 총독(관차시, 觀察)이 되었다.[8]

징종황제와 원종황제 때

824년 무종황제가 사망하고 아들 징종황제의 뒤를 이어 추이지는 링난 서킷(링난 서킷, 현대 광저우에 본사를 둔 광둥성)의 군수와 수도 광저우(廣州) 현(縣)이 되었다. 827년, 징종황제의 동생 원종황제가 황제가 되었을 때, 추이는 수도로 소환되어 인구조사 장관( (戶部尚, 후부상슈)을 역임하였다. 828년 추이는 화 현(華縣, 현대 웨이난, 산시 현)이 되고 화 현에 주둔하는 전궈 군(前國軍) 사령관이 되었다. 829년 화현에 있다가 사망하였다.[2]

참고 및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