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친 왕국

Kingdom of Cochin
코친 왕국
കൊച്ചി മഹാരാജ്യം
【코치 마하랴야】
(말레이알람)
프로테토라도 데 코힘 (포르투갈어)
프로테오라트 반코친 (더치)
프린스리 주 (영어)
12세기 이전 CE[1]–1949
Kingdom of Cochin
깃발
애국가: 옴 나모 나라야나야[citation needed]
Cochin
상태
자본페럼파다푸 (폰나니)
고둥갈루르
트리푸니투라
트라이서
마탄체리
공용어말라얄람
종교
과반수:힌두교(공식)
소수: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정부절대군주제
프린슬리 주
역사
• 확립됨
CE[1] 12세기 이전
• 설정되지 않음
1949
GDP (PPP)견적을 내다
• 합계
600.03 크로아스 USD
통화루피 및 기타 지역 통화
선행자
성공자
체라 왕조
트라반코르코친
오늘의 일부인도

코친 왕국(Perumpadappu Swaroopam, Mada-rajyam, 또는 Kuuru Swaroopam; Kochi 또는 Perumpaapppu라고도 함)은 수도인 코치(영어로는 코친)의 이름을 딴 중세 후기 왕국이며 후에 남인말라바르 해안에 왕자다운 주였다. 한때 많은 영토를 지배하던 코친 왕국칼리쿠트의 자모린족의 침입으로 인해 최소한으로 줄어들었다. 포르투갈의 아르마다가 인도에 도착했을 때 코친 왕국은 에다팔리, 크랑가노레 등의 신하들을 자모린에게 빼앗기고 위험에 처한 코친의 독립을 보존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운니 고다 바르마 왕은 1500년 12월 24일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칼리쿠트의 자모린을 상대로 한 포르투갈과 코친 왕국 간의 동맹 조약을 협상했다. 이 지역에 많은 요새가 건설되어 포르투갈 동인도제도들에 의해 통제되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누엘 요새였으며, 코친은 인도의 토착 왕국들에 대한 원조를 제공하는 포르투갈의 오랜 보호국(1503–1663)이 되었다. 루소-더치 전쟁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1663~1795)는 코친의 동맹국이었다. 이는 앵글로-더치 전쟁영국 동인도 회사(1795–1858, 1809년 5월 6일 확인)가 코친 주(州)에 대한 지배력을 갖게 된 데 따른 것이다. 트라반코어는 1950년 코친 왕국과 합병해 트라반코레-코친 주를 형성했다. 빌라반코데, 칼쿨람, 토발라이, 아가스테스워람, 센고타이 등 5개의 타밀대주 탈룩은 1956년 트라반코르코친에서 마드라스주로 이양되었다.[2] The Malayalam-speaking regions of the Travancore-Cochin merged with the Malabar District (excluding Laccadive&Minicoy Islands) and the Kasaragod Taluk of South Canara district in Madras State to form the modern Malayalam-state of Kerala on 1 November 1956, according to the States Reorganisation Act, 1956 passed by the Government of India.[2]

원래 페럼파다푸 스와루팜으로 알려진 코친 왕국은 중세 후기 체라의 통치하에 있었다. 12세기 마호다야푸람 체라스가 함락된 후, 수많은 다른 지방들과 함께 페럼파두 스와루팜은 자유로운 정치 주체가 되었다. 하지만, 말라바르 연안에 포르투갈 식민지 개척자들이 도착한 후에야 페럼파두 스와루팜은 어떤 정치적 중요성도 획득하게 되었다. 페럼파다푸 통치자들은 에다팔리의 남부디리 통치자들과 가족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에다팔리 통치자에서 페럼파다푸 통치자로 고치비핀이 이양된 후, 후자는 고치의 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영역

The Cochin kingdom (the Princely State) included much of modern-day Thrissur district excluding Chavakkad taluk, few areas of Alathur taluk and the whole of Chittur Taluk of the Palakkad district and Kochi Taluk (excluding Fort Kochi), most of Kanayannur Taluk (excluding Edappally), parts of Aluva Taluk (Karukutty, Angamaly, Kalady, Chowwara, Kanjo또는 현재 인도 케랄라 주의 일부인 스레물라나가람, 말라야토르, 만자프라, 쿤나투나드 탈루크의 일부와 에르나쿨람 지구파라부르 탈루크(첸다망갈람)의 일부다.

역사

기원

코친 왕국이나 페럼파다푸 스와로팜이라고도 알려진 코친 왕가의 출현에 대한 현존하는 서면 증거는 없다.[3] 기록되어 있는 것은 모두 민담과 이야기뿐이며, 지배 왕조의 기원에 대한 다소 흐릿한 역사적 그림이다.

케랄로파티, 케랄라마하트미암, 페럼파다푸 그란다바리 등 살아남은 필사본들은 전통적인 역사 자료로서 신뢰도가 떨어지는 신화나 전설의 모음집이다. 체라 왕조를 다스리던 마지막 페루말(체라 왕조에서 온 왕)이 조카들과 아들들 사이에서 왕국을 분할해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하지를 타고 메카로 여행했다는 전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케랄롤파티는 위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되뇌고 있다. 마지막이자 유명한 "페루말"은 케랄라를 36년간 통치했다. 그는 고둥갈루르(크랑가노레) 항구에 도착해 이슬람으로 개종한 일부 이슬람교도들과 배를 타고 메카로 떠났다. 메카로 떠나기 전에 그는 자신의 왕국을 조카들과 아들들로 나누었다.

Perumpadapu Grandavari는 왕조 기원에 대한 추가 계정을 포함하고 있다. 페럼파다푸 스와로팜의 마지막 타바지는 칼리유가 데이 쇼다상감무라즈람에 탄생했다. 셰라만 페루말(Cheraman Perumal)은 넬라스와람 북쪽에 있는 17개의 '암사(amsa)'와 남쪽에 있는 17개의 암사(amsa)로 땅을 절반으로 나누고, 모두 34개의 암사(amsa)로 나누어 조카들과 아들들에게 권력을 주었다. 칸야쿠마리고카르나(현재의 카르나타카) 사이의 34개 왕국은 체라만 페루말의 마지막 조카딸의 딸이었던 '탐푸란'에게 주어졌다.

케랄로파티345공통시대, 385공통시대 페럼파다푸 그란다바리, 825공통시대 윌리엄 로건 등 왕국의 분단을 기록했다. 케랄라의 이러한 초기 분단들에 대한 서면 기록은 없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12세기 초에 제2차 체라 왕국 시기에 분단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고 한다.[4]

초기 역사

왕국의 원래 본부는 오늘날 말래푸람 지구폰나니 근처의 페럼파다푸에 있었다.[1] 페럼파다푸의 지배자(폰나니 근처)는 티루나바야 전쟁 후 칼리쿠트의 자모린폰나니 지역을 합병하자 중세 초 고둥갈루르로 도망쳤다.[1] 그들은 후에 본부를 고치로 바꾸었는데, 아마도 고둥갈루르에 둘러싸인 지역에서 칼리코트의 자모린이 침입했기 때문일 것이다.[1] 따라서 페럼파다푸 스와로팜은 코친 왕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 바스코가마(Vasco Da Gama)가 코지코드에 상륙하고 칼리코트의 자모린이 쿤잘리 마라카르스(Kozhikode 왕국의 해군 수장) 밑에서 포르투갈인과 싸웠을 때, 코친의 통치자는 포르투갈인과 일렬로 정렬했다.[1]

코친 왕국은 포르투갈이 도착하기 전에 케랄라 중심부의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 그들의 주는 북쪽의 폰나니와 푸카이스타, 동쪽의 아나말라, 남쪽의 코친과 포라크카드까지[citation needed] 뻗어 있었으며, 북쪽 국경의 페럼파다푸에 수도가 있었다. 칼리코트(폴라티리 왕국)는 당시 코친 왕국의 큰 부분을 정복한 에라나드자모린에 의해 정복당했고, 코친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중국 보호국으로서

코지코데의 항구는 중세 케랄라 해안에서 우수한 경제적, 정치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칸누르, 콜람, 코치는 상업적으로 중요한 2차 항구로 세계 각지의 무역상들이 모이는 곳이었다.[5] 15세기 초 말라바르 해안에서는 칼리쿠트와 코친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기 때문에 중국 명나라코친과 그 통치자 키릴리(Keyili)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여 개입하기로 결정했다.[6] 캘리컷은 이 지역에서 지배적인 항구 도시였지만 코친은 주요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었다.[6] 제5차 명나라 보물 항해를 위해 정화제독은 코친의 키일리에게 도장을 수여하고, 그의 왕국의 산을 정오쯔샨(鎮uo山, 나라를 지키는 산)으로 지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6] 정휴는 용러 황제가 직접 지은 포고가 새겨진 석판을 코친에게 전달했다.[6] 코친이 명나라의 보호를 받는 한 칼리코트의 자모린은 코친을 침공할 수 없었고 군사적 충돌은 피할 수 있었다.[6] 명나라 보물 항해의 중단은 결과적으로 코친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는데, 칼리코트의 자모린이 나중에 코친에 대한 침공을 시작했기 때문이다.[6] 15세기 말 자모린은 코친을 점령하고 그의 대표를 왕으로 세웠다.[6]

코친 왕국은 남아시아에서 중국의 보호국이 된 유일한 왕국이었다. 코친왕은 1411년부터 조공을 보냈고, 이후 대사도 파견하여 피납 특허와 도장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특별 대우를 받았다. 중국 황제는 그에게 두 가지 요구를 모두 허락했다.

포르투갈 시대(1503–1663)

마탄체리 궁전-템플은 포르투갈 시대에 코친 라자 베라 케랄라 바르마가 지은 궁전이다.

포르투갈인은 발견의 시대인 1498년 카파드 코지코드에 도착하여 유럽에서 인도로 직항해로를 개설하였다.[7] 코친은 인도 최초의 유럽 정착촌의 현장이었다. 1500년, 포르투갈의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 제독은 칼리코트에서 쫓겨난 후 코친에 상륙했다. 코친의 라자는 포르투갈인을 환영했고 우정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라자는 그들에게 코친에 공장을 지을 수 있게 해주었다(그리고 카브랄이 떠나자 코친은 30명의 포르투갈인과 4명의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을 왕국에 머물게 허락했다). 지원의 제의에 확신한 라자는 적인 칼리코트의 자모린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1502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지휘를 받는 새로운 원정이 코친(Cochin)에 도착하여 우정은 새롭게 바뀌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나중에 칼리코트를[citation needed] 폭격하고 그곳의 아랍 공장을 파괴했다. 이는 칼리코트의 지배자인 자모린을 격분시켰고, 그는 바스코 다 가마가 떠난 후 코친을 공격하여 포르투갈 공장을 파괴하였다. 코친의 라자와 그의 포르투갈 동맹국들은 어쩔 수 없이 비핀 섬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작은 강화 포르투갈 함대의 도착과, 얼마 후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Duarte Pacheco Pereira)와 다가오는 몬순들이 자모린을 놀라게 했다. 칼리쿠트는 군대를 떠올리고 즉시 포위를 포기했다.

시리아 교회의 요양소에 보관된 사도 토마스유물

코친의 라자 왕좌를 확보한 후 포르투갈은 1503년 9월 27일, 칼리쿠트로부터 더 이상의 공격으로부터 포르투갈 공장을 보호하기 위해 에마누엘 요새(포르투갈 왕의 이름을 딴 고치 요새)를 건설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인도에 있는 포르투갈인이 안치되었다. 공사 전 공사는 현지 라자가 위탁하여 인력과 자재를 공급하였다. 1505년 석성이 목성을 대체하였다. 이후, 마을을 더 잘 방어하기 위해 팔리포트의 비펜 섬에 "카스텔로 데 치마"라는 요새가 건설되었다. 포르투갈 함대가 출발할 때 코친에는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와 소함대만이 남았다. 한편 칼리코트의 자모린은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여 그들을 공격했다. 5개월 동안, 코친 왕국은 파체코 페레이라와 그의 부하들의 도움으로 칼리코트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다.

칼리쿠트 사모린의 신하였던 타누르 왕국의 통치자는, 코지코데에 있는 그의 오버로드에 대항하여 포르투갈인의 편을 들었다.[1] 그 결과 타누르 왕국(베타투나두 왕국)은 인도에서 가장 초기 포르투갈 식민지가 되었다. 타누르의 통치자도 코친의 편을 들었다.[1] 16~17세기 코친 왕족의 많은 구성원들이 베톰에서 선발되었다.[1] 그러나 국왕 휘하의 타누르군코친 전투(1504)에서 칼리코트의 자모린을 위해 싸웠다.[8] 그러나 타누르 지역의 무슬림 마필라 상인들의 충성은 여전히 칼리쿠트의 자모린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9]

코친의 라자는 포르투갈인의 도움으로 계속 통치했다. 한편 포르투갈인은 비밀리에 자모린과 동맹을 맺으려 했다. 이후 자모린이 코친 항구를 정복하려는 시도는 포르투갈인의 도움으로 코친의 라자에 의해 좌절되었다. 천천히, 코친의 포르투갈 무기가 증가했는데, 아마도 코친을 왕으로 보호하도록 돕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고아 직후 오랫동안, 동인도 제도의 중심에 위치한 코친은 포르투갈이 인도에서 가졌던 최고의 장소였다. 그곳에서 포르투갈인들은 많은 양의 향신료, 특히 후추를 수출했다.

1530년 성 프란치스코 사비에가 도착하여 라틴 기독교 사명을 세웠다. 코친은 성당에 안장된 포르투갈 총독 바스코가마 묘를 집전했다. 1539년 그의 유해가 포르투갈로 반환될 때까지 프랜시스 교회는 그의 유해가 포르투갈로 반환되었다.[10] 아폰소 알부케르케 시대 직후 케랄라에서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쇠퇴하였다. 그 실패는 강제적[citation needed] 전환과 종교적 박해와 같은 몇 가지 요인들에 기인한다.

네덜란드 시대(1663–1773)

1744년 네덜란드 무역상들에 의해 지어진 볼가티 궁전은 네덜란드 밖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네덜란드 궁전 중 하나이다.

포르투갈의 동맹은 네덜란드인의 동맹으로 이어졌는데, 네덜란드인들은 포르투갈인과 그들의 동맹국들과의 여러 번의 만남 끝에 그때까지 퀼론을 정복했다. 불만을 품은 코친 왕족들은 코친 라자를 타도하는 데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지원을 요청했다. 네덜란드는 나랴칼에 성공적으로 상륙하여 팔리푸람에 요새를 점령하였고, 그들은 이 요새를 자모린에게 넘겨주었다.

미소리아 침공

영국 시대(1814–1947)

식민지 시대의 코친
1960년대 코친
식민지 시대의 코친

1814년 앵글로-더치 조약에 따라 고치 요새와 그 영토를 포함한 고치 섬은 반카 섬과 교환하여 영국에 양도되었다. 조약 체결 이전에도 고치에는 영국인 거주자에 대한 증거가 있다.[11] 브리티시 라지 기간 동안 코친의 프라이슬리 주는 3면(즉, 북쪽, 서쪽, 동쪽)으로 영국 말라바르 구에 둘러싸여 있었고, 남쪽으로는 트라반코어에 의해 포위되었다.[11] 20세기 초에는 항구의 무역이 상당히 증가했고 왕은 항구를 더욱 발전시키기를 원했다. 왕은 1920년 당시 마드라스 총독이었던 윌든 경의 도움을 받아 항구의 기술자 로버트 브리스토를 코친으로 데려왔다. 21년에 걸쳐 그는 코친왕이 코친을 남아시아에서 가장 안전한 항구로 변화시키는 것을 도왔고, 그 항구는 선박들이 새로 개간된 내부 항구와 나란히 정박해 있었고, 그 항구는 긴 줄기의 증기 크레인을 갖추고 있었다.[12] 한편 포트 Cochin, 말라바르 지방의 1956년까지 한 부분이었던, 11월 1일 1866년, Kannur, 탈라 세리, 코지코드, 팔가트와 함께, 마드라스 법 10영국 인도 제국의 1865년(도시들에서 개선의 개헌이 동북아 1850년 행동한다)[13][14][15][16]에 따르면, 첫 시 의회 선거 w. 시 자치체 만들어졌다의 ith 위원회 1883년에 18명의 회원이 행해졌다. 코친의 마하라자는 1896년 마탄체리에르나쿨람에서 마을 의회를 구성하여 지방 행정을 시작하였다. 1925년에는 국민 참여를 돕기 위해 고치 입법회도 구성되었다. 총회는 45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고, 10명이 공식적으로 지명되었다. 투탁카투 마드하비암마는 인도에서 입법부의 일원이 된 최초의 여성이었다.[17] 코치는 1947년 인도의 새로운 도미니언에 기꺼이 합류한 최초의 왕자다운 국가였다. 인도는 1950년 공화국이 되면서 지배권을 상실했다. 트라반코어는 코친과 합병하여 트라반코르-코친을 만들었고, 이 트라반코르-코친은 마드라스 대통령직말라바르 지구와 차례로 통합되었다. 카사라고드는 그 속에 병합되었고 칸야쿠마리는 그 속에서 제거되었다. 1956년 11월 1일 인도케랄라 주가 형성되었다.[18]

관리

행정 목적으로 코친은 7개의 탈룩으로 나뉘었다. (1860년부터 1905년까지)AD) 치투르, 코친, 크랑가노레, 카나야누르, 무쿤다푸람, 트리추르, 탈라필리.

탈룩 면적(평방 마일) 본부
치투르 285 치투르
코친 63 마탄체리
크랭가노레 19 크랭가노레(Now Kodungallur)
카나야누르 81 에르나쿨람
무쿤다푸람 418 이린잘라쿠다
탈라팔리 271 와닥칸체리
트리추르 225 트리추르 (지금의 트리수르)
합계 1,362

수도

뉴델리 코친의 통치자였던 코친 하우스

페럼파다푸 스와로팜의 수도는 12세기 초부터 13세기 말까지 반네리 페럼파다푸 마을의 치트라쿠다에 있었다. 페럼파다푸 스와로팜의 수도는 반네리에 있었지만, 페럼파다푸 왕에게는 마호다야푸람에 궁전이 있었다.

13세기 후반 자모린족이 반네리를 공격하자, 페르넘파두 스와로팜은 수도를 반네리에서 마호다야푸람으로 옮겼다. 1405년 페럼파다푸 스와로팜은 수도를 마호다야푸람에서 코친으로 변경하였다. 14세기 말까지 자모린은 알프카나마틸라캄을 정복하고 마호다야푸람(티루반치쿨람)에게 위협이 되었는데, 이는 페르룸파두 스와로팜이 마호다야푸람에서 코친으로 수도를 바꾼 이유일 수도 있다. 게다가 1341년에 홍수가 나서 푸투비푸 섬(비핀)이 생겼고, 코친은 인도양 무역의 유명한 자연 항구가 되었다.[19]고둥갈로르(크랑가노레) 항구가 그 중요성을 상실해 수도이전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거기서부터 페럼파다푸 스와로팜은 코친 로열 패밀리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16세기에 포르투갈인들이 인도 아대륙에 도착한 것은 코친 정치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코친 왕국은 1500년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과 무역 조건을 협상하면서 유럽 강국과 정식 조약을 맺은 인도 최초의 국가들 중 하나이다.

칼바시에 있는 궁전은 원래 왕들의 거주지였다. 그러나 1555년 왕궁은 마탄체리로 옮겼으며,[20] 이후 (Thrissur)로 이전하였다. 당시 펜바지담푸란(여소탐푸란)과 다른 코흐투담푸란(발리아담푸란(왕)을 제외한 다른 탐푸란)은 벨라라필리의 궁전에 머물렀다.

18세기 초에 트리푸니투라는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 왕국은 트리수르, 코친, 트립니투라로부터 통치되었다.[21] 1755년경 펜바지담푸란(여소탐푸란)과 다른 코흐투담푸란(다른 탐푸란)은 벨라라팔리를 떠나 트립니투라에서 살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트리푸니투라는 코친 왕가의 수도가 되었다.

코친의 마하라하스

체라만 페루말의 조카인 베라케랄라 바르마는 전통적으로 코친의 첫 마하라자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그러나 왕조의 서면 기록은 기원전 1503년부터 시작되었다. 코친의 마하라자는 모든 사원의 우두머리라는 뜻의 강가드라 코빌 아드히카아리칼이라고도 불렸다.[22] 현재 코친 왕가의 우두머리는 코차 바르마 박사(b. 1937년)로 알려진 남성으로 추정된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동맹으로서

본궁인 힐궁
1868년 코친의 라자 라마 바르마 14세
라마 바르마 XV는 그의 퇴위전하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 운니라만 코이칼 1세(c. 1500~1503)
  2. 운니라만 코이칼 2세 (1503년 ~ 1537년)
  3. 베에라 케랄라 바르마 1세 (1537–1565)
  4. 케샤바 라마 바르마(1565–1601)
  5. 베에라 케랄라 바르마 2세(1601–1615)
  6. 라비 바르마 1세 (1615–1624)
  7. 베에라 케랄라 바르마 3세 (1624–1637)
  8. 고다 바르마 1세 (1637–1645)
  9. 베라라이라 바르마(1645–1646)
  10. 베에라 케랄라 바르마 4세 (1646–1650)
  11. 라마 바르마 1세(1650–1656)
  12. 라니 강가달락시미 (1656–1658)
  13. 라마 바르마 2세 (1658–1662)
  14. 고다 바르마 2세 (1662년–1663년
  15. 베에라 케랄라 바르마 5세 (1663–1687)
  16. 라마 바르마 3세 (1687–1693)
  17. 라비 바르마 2세 (1693–1697)
  18. 라마 바르마 4세 (1697–1701)
  19. 라마 바르마 5세(1701–1721)
  20. 라비 바르마 3세 (1721–1731)
  21. 라마 바르마 6세 (1731–1746)
  22. 케랄라 바르마 1세 (1746–1749)
  23. 라마 바르마 7세 (1749–1760)
  24. 케랄라 바르마 2세 (1760–1775)
  25. 라마 바르마 8세 (1775–1790)
  26. 라마 바르마 IX (Shaktan Thampuran) (1790–1805)

영국의 지배하에.

  1. 라마 바르마 IX (Shaktan Thampuran) (1790–1805)
  2. 라마 바르마 X (1805년 - 1809년) – 벨라라팔리야일 테에페타 탐푸란 ("벨라라팔리"에서 죽은 왕)
  3. 케랄라 바르마 3세 (Vera Kerala Varma) (1809–1828) – 카르키다카 마아사틸 테에페타 탐푸란 ("카르키다카" 월(ME)에 죽은 왕)
  4. 라마 바르마 XI(1828–1837) – 툴람-마아사틸 테에페타 탐푸란("술람" 월 (ME)에 죽은 왕)
  5. 라마 바르마 XII(1837–1844) – 에다바-마아사틸 테에페타 탐푸란("에다밤" 월 (ME)에 죽은 왕)
  6. 라마 바르마 13세 (1844–1851) – 트리슈르일 테페타 탐푸란 ("트리샤베루어" 또는 트리슈어로 죽은 왕)
  7. 케랄라 바르마 4세 (Vera Kerala Varma) (1851–1853) – 카시야일 테에페타 탐푸란 ("카시" 또는 바라나시에서 죽은 왕)
  8. 라비 바르마 4세 (1853–1864) – 마카라 마사틸 테에페타 탐푸란 ("마카람"월 (ME)에 죽은 왕)

대영제국 하의 왕자다운 국가로서

  1. 라비 바르마 4세 (1853–1864) – 마카라 마사틸 테에페타 탐푸란 ("마카람"월 (ME)에 죽은 왕)
  2. 라마 바르마 14세 (1864–1888) – 미투나 마사틸 테에페타 탐푸란 ("미투남"월 (ME)에 죽은 왕)
  3. 케랄라 바르마 5세 (1888–1895) – 칭암 마아사틸 테에페타 탐푸란 ("칭암"월 (ME)에 죽은 왕)
  4. 라마 바르마 XV (Sir Sri Rama Varma) (1895–1914) – 라자르시, 압드 전하 (1932년 사망)
  5. 라마 바르마 16세 (1914–1932) – 마드라실 테에페타 탐푸란 (마드라스 또는 첸나이에서 죽은 왕)
  6. 라마 바르마 16세 (1932–1941) – 다아르미카 차크라바시 (달마의 왕), 차우아라일 테에페타 탐푸란 ("초아라"에서 죽은 왕)
  7. 케랄라 바르마 6세(1941–1943) – 미덕칸 탐푸란
  8. 라비 바르마 5세(Ravi Varma Kunjappan Thampuran)(1943–1946) – 쿤자판 탐푸란(미덕칸 탐푸란의 형제)
  9. 케랄라 바르마 7세 (1946–1947) – 아이키아 케랄람 탐푸란 (케랄라를 통일시킨 왕)

독립 후

  1. 라마 바르마 16세(Rama Varma XIII, 1948년 ~ 1964년)는 패리크시트 탐푸란(Parikshith Thampura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코친 제국의 마지막 공식 통치자였다.
  2. 라마 바르마 XIX(1964–1975) – 랄란 탐푸란
  3. 라마 바르마 XX(1975–2004) – Anyian Kochunni Thampuran
  4. 케랄라 바르마 8세(2004~2011년) – 코춘니 탐푸란
  5. 라마 바르마 XXI(2011~2014년) – 코차니얀 탐푸란
  6. 라비 바르마 6세(2014~2020) – 코차니얀 탐푸란
  7. 라마 바르마 XXI(2020-현재) - 코차 바르마 박사(코차누잔 탐푸란 라마 바르마)

코친의 총리(1947~49)

No.[a] 이름 초상화 임기[24] 파티 조립 임명자

(모나치)

보낸 사람 에게 재직일수
1 파남필리 고빈다 메논 Panampilly statue.jpg 1947년 8월 14일 1947년 10월 22일 51일 독립적 제6차 공의회

(1945–48)

케랄라 바르나 7세

코친의 마하라자

2 T. K. 네어 1947년 10월 27일 1948년 9월 20일 334일
3 E. 이칸다 워리어 Ikkanda variar.jpg 1948년 9월 20일 1949년 6월 30일 283일 입법

조립

(1948–49)

코친 족장

첸다망갈람의 팔리아드 아칸(Paliath Achan) 또는 첸다망갈람의 팔리암 네어(Paliam Nair) 가문의 우두머리는 17세기 초부터 코친 국의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코친의 장관직에 대한 세습권을 가지고 있었다. 팔리아드 아찬은 왕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고, 때로는 왕보다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또한 코친 지역 주변에는 데사바지스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페럼파다푸 스와루팜에 버금가는 팔리얌 스와루팜이 있었다. Other powerful lords around these areas were Cheranellore Karthavu who was the head of the Anchi Kaimals, Muriyanatt (Mukundapuram-Nadavarambu) Nambiar who was the head of Arunattil Prabhus, Kodassery Kartha Mappranam Prabhu-Vellose Nair, Chengazhi Nambiar (Chengazhinad Naduvazhi), and Edappali Nampiyathiri.

KP Padmanabha Menon은 그의 케랄라 역사에서, 제2권에서는 에라나쿨람의 모든 소유자로써 수장이 Cheranellur Kartha였던 Anji Kimals를 언급하고 있다. 사실 에라나쿨람은 케랄라 초기 지도에서 안지 카이말(Anji Kaimal)로 알려져 있다. 말라바르에서 네덜란드어를 보라(Dutch Records No.13), 1910년에는 코친 주보다 거의 두 배나 큰 안지카이말의 면적을 보여주는 공통시대 1740의 지도를 보여준다. The other chiefs he mentions quoting Gollennesse (Dutch East India Company) is the 1) Moorianatt Nambiar 2) Paliath Achan (mentioned above), 3)Codacherry (Kotasseri) Kaimal, 4) Caimalieone (female Kaimal) of Corretty, 5) Changera Codda Kaimal, and 6) Panamoocattu Kaimal (Panambakadu Kaimal). 마지막 네 명의 카이말족은 난디에테르 나두의 카이말족으로 알려져 있다. 난디에테르 나두의 카이말족은 1694년부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Heer Van Reede에 따라 4만 3천 명의 나야르 군대를 주둔시켰다.[25]

모계 상속

코친 왕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