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샤스부반 전투

Battle of Rakshasbhuvan
락샤스부반 전투
후기 무굴-마라타 전쟁의 일부
날짜1763년 8월 10일
위치
인도 고다베리 락샤스부반 댐
결과 마라타 제국의 승리
호전성
마라타 제국

히데라바드 니잠

  • 반란 마라타 파벌
지휘관과 지도자
페슈화 마다브라오 1세
야노지 분슬레
니잠 알리 칸
비탈 순다르
사상자 및 손실
12,000 10,000

락샤스부반 전투는 1763년 8월 10일에 전투되었다.[1] 파니파트 전투에서 마라타족이 패배한 후, 그들의 경쟁자들은 마라타스의 손에서 과거의 손실을 만회할 기회를 잡기 시작했다. 특히 히데라바드의 니잠은 그의 덕과 귓불이 모두 살해된 우드기르 전투에서 잃었던 영토를 되찾고 싶었다. 그는 마라타스에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전투

To boost the morale of his army, on the advice of his Diwan Vithal Sundar Pratapwant, the son of Sundar Narayan, who had renovated the Kala Ram temple at Nasik (Historian Ninad Bedekar mentions Vithal Sundars surname as "Parshurami") he declared Inams and Jagirs to many warriors who had deserted the Marathas and had joined with him to replace his w우드기르에서 살해된 영사관들 그들 중 주요 전사는 비탈 순다르의 조카인 비나야크 다스라오(Vinayak Dasrao)이고, 다른 대신들은 나르시냐 딕시트 카이가온카르(Narsinha Dixit Kaygaonkar)이다. 그의 아버지는 번델칸드에서 마라타스, 산카르지 조시, 크리슈나로 카니트카르(Krisnara)를 위해 싸우다.

후기 3명에게는 카이가온 토케, 바드나푸르, 림바가네쉬의 자기르스가, 비나야크 다스라오는 느레가온의 이남을 받았다. 비탈 순다는 오랑가바드 구에서 가장 비옥한 핌프리 지역의 자길르를 받았다. Amongst these, Krishnarao Kanitkar had given refuge to Vyankatrao Ghorpade of Ichalkaranji, Sardar Kolhatkar of Pen (Brother-in-law of Sadashivrao Peshwa) and Sardar Hariba Patwardhan of Sangli during their flight from Scindia's forces during the mutiny of the pretender of Sadashiv Bhau. 이 피난처는 사르다르 투코지 홀카르의 요청으로 주어졌다.

마라티 지역에서 온 이 자기르다르 2만 5천 명의 군대와 이스마일 칸 판니, 라호지 자드하브라오 4세, 나나사헵 니발카르 하르데카르의 충성군 이상의 군대는 니잠도 부세이 장군의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았다. However, the Marathas were being led by Peshwa Madhavrao (until the skirmish of Chambhar Gonda, Senasahebsubha Janoji Bhonsle and Raghunathrao, uncle of Peshwa were also in the camp), who was assisted by Visaji Tryambak, Sardar Naro Shankar Dani, Babuji Naik (A Chief of Senasahebsubha's Nagpur Army who, prior to battle a few months before, had made 니잠과의 우호조약, 사르다르 야슈완트라오/산타지라오 와블(코페르가온), 무돌의 사르다르 말로지라제 3세 호르파데는 전투가 5~6개월 동안 진행된 후 락샤스부반에서 니잠의 군대를 격파했다. Many of Nizam's trusted dukes like Shambhulal, Hamid Ulla Khan, Laxmanrao Khandagale, Rukn Ud Doula, Ramchandrarao Jadhavrao of Bhalki, Mir Moghal Ali Khan alias Nasir Ul Mulk left Nizam after the throne was encroached by Nizam Ali, brother of dethroned Nizam Salabat Jung and joined Marathas.[citation needed]

아이러니하게도 니잠 대신 싸운 고빈드라오 고르파데는 마라타스와 함께 있던 아버지 말로지라오 고르파데의 손에 살해되었다. 니잠의 최측근 비탈 순다르가 카스바 푸네의 사르다 마하다지 시토레 데쉬무크에게 살해되었다.[citation needed]

휴전

오랑가바드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이 조약으로 니잠족은 발키텔랑가나마하라슈트라 고다바리 강 동부를 제외한 50개의 열상 영토를 잃었다. 그들은 발키와 교환하여 비다르와 날두르그 포츠를 얻었다.[citation needed]

정착지의 일부로 뉴런과 림바가네쉬는 마라타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818년 마라타스가 패배한 후, 영국은 이 영토를 니잠 4세에게 돌려주었고, 이 두 자기르는 니잠 주에 합병되었다.[citation needed] 이로 인해 살라르 2세5대 니잠에게 그들의 자길르 종료를 권고하게 되었다.

그 결과 뉴런, 바드나푸르, 카이가온의 자기르족은 타클리/라드 사왕이의 자기르와 합병되었다. 림바가네쉬의 군대는 1888년 시칸다르 칸 경의 아버지에 의해 복구된 아미르 나와즈 칸의 5000만삽, 날두르크의 탈룩다르, 비흐의 수집가 등과 합쳐졌다.

이 결정적인 승리는 마라타스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놀랍게도 비탈 순다르의 공석인 디완은 니잠의 더르바에 있는 페화 로비스트인 미르 무사 칸 루크 우드 다울라에게 주어졌다.

참고 항목

참조

  1. ^ "HISTORY – MARATHA PERIOD". Nasik District Gazetteer.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31 August 2010. Retrieved 4 September 2010.

외부 링크

2005년 4월 29일 웨이백 머신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