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크르 시치

Bakr Sidqi
바크르 시드키 장군
Bakrsidqi.jpg
제복을 입은 바크르 사드키 장군
태어난1890
키르쿠크, 모술 빌라예트, 오스만 제국
죽은1937년 8월 11일 (1937-08-11) (47세)
이라크 하셰마이트 왕국 모술
파묻힌
얼리전스Flag of the Ottoman Empire.svg 오스만 제국
Flag of Iraq (1921–1959).svg 이라크 하셰마이트 왕국
서비스/지점Iraq 이라크 왕립군
근속년수1913–1937
순위일반
전투/와이어

바크르 시드치아스카리([1]아랍어: بكر صديي الكي)는 이라크 쿠르드족 출신 장군으로 1890년 키르쿠크에서 태어나 1937년 8월 11일 모술에서 암살되었다.[2][3]

초년기

Bakr Sidqi는 쿠르드족 [4]마을인 '아스카르'나 키르쿠크에서 쿠르드족 가정에서 태어났다.[5]

군경력

이스탄불의 군사대학에서 공부하여 소위로 졸업한 그는 발칸 전쟁에 참전하여 이스탄불의 스태프 칼리지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4] 제1차 세계 대전 중 아랍 반란이 발발하면서 시드는 시리아에서 파이잘의 군대에 합류했고, 다른 많은 샤리프 장교들과 함께 알레포에서 복무했다.[4]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영국군의 정보요원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1921년 영국 총참모부로부터 파이잘의 아랍왕국이 붕괴된 후 이라크군의 장교 계급으로 추천받았다. 그의 계획은 언젠가 총참모장이 되는 것이었지만, 일부 이라크인들은 그를 "친-쿠르드 정책"을 추진한다고 비난하면서 반대했다. 이에 대해 시드는 자신의 반아랍 출신을 부각시켜 자신과 자파르아스카리 가문의 유대관계를 연결시켰다. 그는 후에 영국 스탭 칼리지에 다녔고 이라크에서 가장 유능한 장교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그는 사관학교에서 강의를 하였고 1928년 대령, 1933년 준장직을 달성했다.

1933년 8월 시드키는 모술 인근 시멜레에서 이른바 '유대적인 아시리아 분리주의자들'을 분쇄하기 위해 영국 이라크군에 북진 명령을 내렸고, 이로 인해 시멜레 학살로 아시리아 민간인 3000명이 이 지역에서 살해되었다.

영국인들은 1934년 그를 "이라크군에서 가장 뛰어난 지휘관이자 가장 효율적인 지휘관"이라고 칭송했다. 1935년 알 루미테사와 알 디와니야에서 일어난 시아 아랍 부족 반란을 전례 없이 가혹하게 단속하였다.

말리크 무프티에 따르면 그는 쿠르드족과 투르크멘족이 고위 장교 90%가 될 때까지 조직적으로 군내 직책을 승진시켜 분노를 샀다.[6] 바크르 시드키는 "이란과 터키의 쿠르드족을 포함하는 쿠르드족 국가를 이라크 북부에 세우려 했다"고 주장했다.[7]

시멜레 학살

레스브리지 헤럴드지
1933년 8월 18일, 시멜레 대학살에 대한 보고.

1933년, 이라크 주재 미국 외무부 장교인 폴 크나벤슈아시리아인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열정"으로 묘사했다.[8] 새로운 아시리아의 정신적-임시 지도자인 마르 시문 XXI 에샤이는 이라크 독립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러시아가 약속했던 것처럼 이라크 하셰마이트 왕국 내의 아시리아인들에게 자치권을 요구하고 영국의 지지를 구했다. 그는 1932년 국제연맹에 회부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이라크 레비에서 물러나고 민병대로 재결집하여 북쪽에 집중하여 사실상의 아시리아 거주지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9]

1933년 6월, 젊은 총대주교히카트 술레이만 정부와[clarification needed] 협상을 위해 바그다드로 초대되었고, 시간적 권위의 포기를 거부하다가 그곳에 구금되었다. 마르마르 시멘과 그의 가족은 결국 키프로스로 유배되어 동양의 아시리아 교회의 수장이 시카고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곳은 아르빌로 반환된 2015년까지 남아 있었다.[10]

1933년 8월 초, 시리아 망명을 거부당한 1,000명 이상의 비무장 아시리아인들이 북부 이라크의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시리아를 장악한 프랑스는 아시리아인들이 무장하지 않았다고 이라크인들에게 통보했다. 하지만, 이라크 군인들이 프랑스군에 의해 팔이 돌아온 사람들을 무장 해제하는 동안, 총성이 발사되었다. 누가 먼저 발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라크 왕립군은 패배했고, 30명의 이라크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반아시안적 외국인 혐오증은 위기 전반에 걸쳐 뚜렷이 나타났다.

대치 소식이 바그다드에 전해지자 정부는 군대의 단합에 재앙이 닥칠 것을 우려했다. 정부는 불규칙한 쿠르드를 사용했는데, 8월 2일 주간에 아시리아 마을 두 곳에서 1,280명 이상의 비무장 아시리아인들을 살해했으며, 대부분의 학살은 8월 7일에 일어났다. 그 후, 8월 11일, 시드키는 중무장을 이끌고 당시 이라크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아시리아 지역 중 하나였던 시멜레 지구로 갔다.

시멜레 지구의 아시리아 인구는 무차별적으로 학살되었다. 한 방에서만 바즈 부족의 아시리아인 81명이 학살당했다. 종교 지도자들이 주요 목표물이었다. 하나는 참수되고 다른 하나는 산 채로 불에 탄 것을 포함하여 여덟 명의 아시리아 사제들이 학살 중에 살해되었다. 영국 IRF 비행기가 나중에 이라크 정부를 상대로 사용될 사진을 찍는 동안, 소녀들과 여성들은 강간당하고 이라크 군 지휘관들 앞에서 벌거벗은 채 행진하도록 만들어졌다.

도후크에서 무장하지 않은 아시리아 민간인 880명이 시드의 부하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결국 모술도후크 지역에서 71여 개의 아시리아 마을이 표적이 됐다. 8월 13일, 바크르 시드키는 알코시로 군대를 이동시켰고, 그곳에서 아시리아인들에게 추가 학살을 가할 계획을 세웠다.[11][12][13] 주요 캠페인은 8월 16일까지 계속되었지만, 아시리아인에 대한 폭력적인 이유 없는 공격이 이달 말까지 보고되었다. 선거운동이 끝난 후, 바크르 시드키는 "승리적인" 집회에 바그다드로 초대되었다.

시멜레 대학살은 라파엘 렘킨에게 학살의 개념을 창조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1933년 렘킨은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형사법에 관한 국제연맹 법률위원회에 발표했는데, 이 회의에서 국제법 위반 범죄로 야만죄에 대한 에세이를 준비했다. 나중에 대량학살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한 이 범죄의 개념은 대부분 시멜레 대학살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14] 아시리아인들은 이라크의 쿠르드족 '세습 적'들 사이에서 살고 있었고, "라파엘 렘킨이 대량학살이라고 평가해야 할 대부분의 인명 손실을 겪은 것은 쿠르드족의 손에 달려 있었다"[15][16][17]고 말했다.

1935년 루마이야와 디와니야가 반란을 일으킨다.

쿠데타

1936년, 파이잘의 무능력한 아들이 통치하던 중, 당시 이라크군 사령관 대행이었던 가지왕야신하시미 정부에 대항하여 아마도 아랍 세계에서 최초의 근대적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라크 군용기 11대가 1936년 10월 29일 바그다드 상공에 전단을 투하해 야신 알 하시미 정권 퇴진 및 축출된 반개혁 총리 히크마트 술레이만의 분부를 요청했다. 또 전단에는 "우리의 진정성 있는 호소에 답하지 않는 자에 대해 군사적 조치가 취해질 것"이라고 시민들에게 경고했다.

이 전단에는 '개혁군 사령관'으로 싯치가 직접 서명했다.

바크르 시드키 장군은 타하 알 하시미 장군이 터키 앙카라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더 좋은 시기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참모총장 직무대행으로서, 시드키는 군사 쿠데타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공유하는 군대와 공군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지시를 따르라고 명령했다. 시드의 반대파의 어떤 간섭도 시치 자신이 무력화시켰는데, 시치 자신은 타하 알 하시미에게 회군하지 말라는 전보를 간신히 보냈다. 마지드 카두리가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는 시드키가 영국 대사인 아치발드 클라크 커 경을 자후르 궁전으로 불러 조언을 구했다고 호두리에게 폭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사는 국왕에게 이라크 정부의 모든 장관들을 긴급 회의에 초대할 것을 제안했다. 참석자 중에는 야신 알 하시미, 누리사이드, 자파르 알 아스카리 장군, 라시드 알리 내무장관 등이 포함됐다.

즉시, 왕은 혁명 운동에 대한 어떤 개념도 무시했지만, 세라이에서 약간의 폭격과 바그다드 쪽으로 군대가 진격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누리 알 세이드를 제외하고 궁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바크르 시치 장군의 요구에 응하고 히크마트 술레이만이 집권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동의했다. 그 결과 야신 알 하시미가 사임했다.

Khodduri에 따르면, 커 대사는 이 회의에 히크마트를 초대할 것을 제안했다. 공교롭게도 술레이만은 싯치와 라티프 누리가 쓴 편지를 왕에게 전달하기 위해 궁전에 도착했다.

쿠데타 당시 국방장관을 지냈고 야스인 알 하시미 전 이라크 총리를 두 번이나 지낸 자파르 알 아스카리는 바그다드 쪽으로 2개 대대가 진격하는 것을 방해하려 함으로 시드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게다가, 그는 여전히 그를 왕립 이라크 군대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장교들에게 호소하려고 했다. 알-아스카리의 행동으로 인한 어떠한 이견도 경계한 시드키는 그의 부하 두 명인 공군 소속 아크람 무스타파와 시메일 대학살에 참여했던 이스마일 토할라를 암살하기 위해 보냈다.

알 아스카리의 죽음은 구 정부에 대한 도전으로 널리 여겨졌고, 먼저 군대를 장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나라를 장악하려는 시드의 탐구가 두드러졌다. 그 결과 누리 알 사이드는 카이로로 유배되었고, 야신 알 하시미는 이스탄불로 유배되었다. 하지만, 쿠데타는 "아랍 민족주의자들 사이에 반 쿠르드적인 감정"[18]을 불러일으켰다.

분명한 전복에도 불구하고, 시드키는 군대를 이끌고 바그다드에 들어가 시민들과 함께 퍼레이드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호두리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최후의 저항을 만류하려는 움직임이라고 느꼈고, 어떤 사람들은 시드키가 퍼레이드로 자신을 증명하고 이라크의 새로운 정권을 끌어들여 박수를 받고 싶어한다고 느꼈다고 한다.

쿠데타의 결과로 야신은 국왕이 사직서를 수리하는 정식 편지를 쓰라고 주장하면서 물러났다. 술레이만은 총리 겸 내무장관이 되었지만, 정부를 전복한 후, 군 통수권자로서 본질적으로 이라크를 통치한 것은 시드키였다. 새 내각에는 아부 알 트임만 재무장관, 카밀 알 차디르치 경제공작부 장관, 압드 알 라티프 국방부 장관, 유수프 이즈 ad-딘 이브라힘 교육부 장관 등이 포함됐다. 시드키 장군이 쿠데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내각직을 원하지 않았고 총참모장으로 남아 있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알 아스카리 살해사건은 특히 이라크군들 사이에서 새 정부에 대한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술레이만의 내각은 시드가 암살될 때까지 10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그 결과 술레이만은 총리직을 사임하고 자밀알미드파이가 뒤를 이었다.

싯치는 지능, 야심, 자신감으로 유명한 이라크 왕립군에서 가장 뛰어난 장교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또한 아타튀르크와 레자 샤와 함께 한 입장인 개혁을 이끌어내고 질서를 이루려면 군대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참고 항목

메모들

  1. ^ "The National Archives of the UK, FO 406/76, p. 87" (PDF). 1938. Archived from the original (PDF) on 2017-04-15.
  2. ^ 데이비드 맥도월, I.B. 쿠르드족의 현대사타우리스, 2000년 ISBN 978-1-85043-416-0, 페이지 289.
  3. ^ 데니스 나탈리, 더 쿠르드와 더 스테이트: 이라크, 터키, 이란에서 국가 정체성의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시라큐스 대학 출판부, 2005년 ISBN 978-0-8156-3084-5, 페이지 35.
  4. ^ a b c 에드먼드 가렙, 베스 더거티, 이라크 역사사전 허수아비 프레스, 2004, ISBN 978-0-8108-4330-1, 페이지 224.
  5. ^ 이라크 리오라 루키츠: 내셔널 아이덴티티 검색, Routrege, 1995, ISBN 978-0-7146-4550-6, 페이지 86.
  6. ^ 소버린 크리에이션스: 시리아와 이라크의 범아랍주의와 정치 질서 말릭 무프티. 33-34
  7. ^ K. 라만, 이란-이라크 전쟁 69페이지 https://books.google.com/books?hl=de&id=r3bCAAAAIAAJ
  8. ^ 이라크 민족주의의 원인으로서의 시멜 대학살: 아시리아 대학살이 어떻게 이라크의 계엄 민족주의를 창조했는가
  9. ^ Baum, Wilhelm; Winkler, Dietmar W. (2003). The Church of the East: A Concise History. London-New York: Routledge-Curzon. ISBN 9781134430192.
  10. ^ Baumer, Christoph (2006). The Church of the East: An Illustrated History of Assyrian Christianity. London-New York: Tauris. ISBN 9781845111151.
  11. ^ 스태포드(2006), 페이지 a62.
  12. ^ 스태포드(2006년), 페이지 162.
  13. ^ 그는 "쿠르드족에 의해 아시리아 마을에 대한 공격이 재개됐다는 보도가 있었고 8월 중순 영국 소식통들은 약 500명의 아시리아인들이 살해당했다고 주장했으며 이 중 200명은 여성과 아이들이라고 주장했다. 람세이 맥도날드의 영국 정부는 '심각한 방해와 방해'를 받고 있다고 보고되었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전면' 때문에 조국을 놓고 다시 한번 크게 동요하고, 이라크 군대의 손에 의해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불만족스러워하고, 현재 쿠르드족에게 '수백명의 학살'이 가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대량학살을 발명한 사람: 라파엘 렘킨, 제임스 마틴, 역사검토연구소, 1984 페이지 252-3
  14. ^ 대량학살을 창시한 남자: 제임스 조셉 마틴의 라파엘 렘킨의 공적 경력과 결과. 166페이지 1984.
  15. ^ 대량학살을 창시한 남자: 라파엘 렘킨의 공적 경력과 결과, 제임스 마틴, 역사 리뷰 연구소, 1984 페이지 252.
  16. ^ 대량학살을 범죄로 규정하는 렘킨의 연구는 1933년으로 거슬러 올라갔고, 이는 이라크의 시멜레 대학살에서 촉발되었다. 윌리엄 코리 "라파엘 렘킨: '비공식적인 남자'" 6월 중순1989년 7월, 페이지 45-48
  17. ^ 그러나 대량학살을 규정하는 작업도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에서 영감을 얻었다. "100만 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 렘킨 학살사건에 대한 장문의 원고 처리에서 이러한 범죄들을 그래픽으로 상세하게 묘사했다...홀로코스트의 공포와 그의 텍스트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다. 평화로운 시민들이 교회나 다른 건물로 대피하는 것, 여성과 아이들을 고의적으로 살해하는 것, 그리고 체를 달고 도착하는 쿠르드족들이 희생자들의 재를 뒤지며 그들이 삼켰을지도 모르는 금을 찾는 것 등이다. 존 쿠퍼, 라파엘 렘킨과 대량학살 협약 250페이지
  18. ^ 데이비드 맥도월, 쿠르드족의 현대사, 288페이지

참조

추가 읽기

  • 이일디즈, 케림. 이라크의 쿠르드족,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런던: 명왕성 출판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