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 우베이다 이븐 알자라

Abu Ubayda ibn al-Jarrah
아부 우베이다 이븐 알자라
أبو عبيدة بن الجراح‎‎
아민울음마[a]
تخطيط اسم أبو عبيدة بن الجراح.png
레반트 총독
재직중
634–639
모나크우마르 이븐 알카타브
선행자사무실 설립[b]
성공자무아위야 1세
총사령관
라시둔 군
재직중
634–639
임명자우마르 이븐 알카타브
모나크우마르 이븐 알카타브
선행자칼리드 이븐 왈리드
개인내역
태어난583
메카
죽은639(639-00-00) (55-56) / 18 AH
요르단 계곡 (중동)
배우자
  • 힌드 빈트 자바르
  • 와르자
아이들.
  • 야지드
  • 우베이다
  • 우메르
상위 항목'아브둘라 이븐 알자라(아버지)
병역
얼리전스라시둔 칼리프하이트
지점/서비스라시둔군
근속년수632–639
순위야전사령관(632–634)
총사령관(634–639)
전투/와이어이슬람-쿠라이시 전쟁
라시둔의 레반트
요르단 데이르 알라의 아부 우베이다 신사

ʿĀmir ibn ʿAbd Allah ibn al-Jarrāḥ (Arabic: عامر بن عبدالله بن الجراح‎; 583–639 CE), better known as Abū ʿUbayda (Arabic: أبو عبيدة‎) was a Muslim commander and one of the Companions of the Islamic prophet Muhammad. 그는 대부분 파라다이스가 약속된 10명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라시드 칼리프 우마르 시대에는 라시둔 군대의 큰 구역의 사령관으로 남아 우마르가 라시둔 칼리프하테에게 임명한 후계자 명단에 올랐다.

초년기

아부 우베이다는 직업별 상인 '압둘라 이븐 알자라'의 집에서 583년 CE에 태어났다. 아부 우베이다는 바누 알 하리스 이븐 피어의 쿠라이시 씨족에 속했다. 이슬람을 포용하기 전에는 쿠라이슈의 귀족 중 한 명으로 여겨졌으며 겸손함과 용기로 메카 쿠라이시 사이에서 유명했다.

이슬람으로의 개종

611년이 되자 마호메트는 메카 사람들에게 신의 은총을 설교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과 친척들을 개인적으로 이슬람의 길에 초대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는 28세의 나이로 611년 아부 바크르 다음 날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아비시니아로 이주

아부 우베이다는 이슬람교도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메카에서 겪었던 혹독한 경험을 통해 살았다. 다른 초기 무슬림들과 함께 그는 쿠라이쉬의 모욕과 압제를 견뎌냈다. 아비시니아(악숨 제국)로의 첫 이주가 성공하면서 무슬림들을 상대로 한 이 폭력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메디나로 마이그레이션

CE 623년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이주했을 때 아부 우베이다도 이주했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 도착하자 각 이민자(무하지르)와 메디나(안사리)의 한 주민과 짝을 지어 무함마드 이븐 마슬라마와 아부 우바이다를 맺어 그들을 믿음의 형제처럼 만들었다.

무함마드 시대 군사 캠페인

배드르 전투

624년에 아부 우베이다는 바드르 전투에서 이슬람교도와 메카의 쿠라이시 사이의 첫 번째 주요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 쿠라이슈의 군대와 함께 싸우고 있던 친아버지 압둘라 이븐 알자라와 싸웠다. 아부 우바이다는 나중에 그를 공격하여 죽였다.

코란의 다음 구절은 아부 우바이다의 이러한 인격 전시를 가리킨다.

너는 비록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나 아들들, 형제들 또는 동족들이었더라도 알라와 그의 전령사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알라와 최후의 날을 믿는 사람들을 찾지 못할 것이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에 믿음의 글을 쓰시고, 주님에게서 받은 영으로 그들을 강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리버스가 흐르는 가든에 거주하도록 허락할 것이다. 알라는 그들과 함께 기뻐할 것이고, 그들은 그와 함께 기뻐할 것이다. 그들은 알라의 정당이다. 정말로 펠리시티를 성취할 것은 알라당이다.

Qur'an sura 58, Al-Mujadila, ayah 22[1]

우후드 전투

625년에 우후드 전투에 참가하였다. 2단계 전투에서는 칼리드 이븐왈리드 기병대가 이슬람의 승리를 패배로 바꾸면서 무슬림들을 후방에서 공격했을 때 무슬림 병사들의 대다수가 전장에서 대패했고,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아부 우베이다는 그들 중 하나였고 그는 쿠라이시 군인들의 공격으로부터 무함마드를 보호했다. 이날 아부 우베이다는 볼에 침투해 있던 무함마드의 갑옷 두 개를 빼내려다 앞니 두 개를 잃었다.[2]

유대인 부족과의 갈등

627년 말 그는 참호 전투와 바누 쿠라이자 침공에도 참가했다. 그는 또한 인근 마을을 약탈하고 있는 타리바안마르 부족을 공격하고 파괴하기 위해 출발한 소규모 원정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628년에 그는 후다이비야 조약에 참여했고 조약에 대한 증인 중 한 명이 되었다.[2] 같은 해 말, 그는 카이바로 가는 무슬림 캠페인의 일원이 되었다. [2]

무함마드 시대 말기의 캠페인

무슬림 군대가 메카를 정복한 630년, 아부 우베이다는 네 개의 다른 경로에서 도시로 들어온 네 개의 사단 중 하나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 해 말, 후나인 전투와 타이프 포위전에 참가하였다. 그는 또한 무함마드 자신이 지휘하는 타부크 캠페인의 일원이기도 했다. 나즈란에서 온 기독교 사절단이 타부크 전투에서 돌아오자 메디나에 도착해 이슬람에 관심을 보이며 무함마드에게 종교의 문제와 다른 부족 문제에 대해 지도할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아부 우베이다는 무함마드에 의해 그들과 함께 가도록 임명되었다. 는 또한 무함마드에 의해 세자로 바레인으로 보내졌다. 그는 632년 무함마드가 죽었을 때 메카에 있었다.

지휘관으로서의 캠페인

629년에 무함마드는 '암르 ibn al-'As를 다트 알 살라실(Daat al-Salaasil)로 보내 증원을 요청했는데, 이것은 아부 우베이다 이븐 알자라(Abu Ubayda ibn al-Jarrah)의 원정대라고 알려져 있었다. 무함마드는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가 포함된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아부 우베이다를 보냈다. 그들은 적을 공격하고 무찔렀다. 같은 해 말, 쿠라이시 카라반들의 항로를 찾기 위해 그의 지휘 아래 또 다른 원정대가 파견되었다.[3]

아부 바크르 시대

632년 무함마드가 바누사이다사키파에서 의 후계 문제가 일어났을 때 아부 우베이다는 아부 바크르, 우마르와 함께 그곳에 있었다. 우마르는 아부 우베이다에게 칼리프를 위해 손을 뻗으라고 말했으나 거절하고 아부 바크르에게 손을 내밀어 동맹의 서약을 받들라고 말했다. 아부 바크가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를 이라크에 보내 정복했을 때 리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네 명의 무슬림 군대를 레반트로 보내 아부 우베이다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표적은 에메사로 선정되었고 샤르젤 이븐 하사나의 군대 이후 타부크 지역을 통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634년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이라크에서 시리아로 도착할 때까지 이슬람 군대의 사령관으로 남아 있었다. 아부 우베이다는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로부터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에게 그들이 만난 보스라 가사니드 도시에 도착할 때까지 그대로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성은 634년 7월 중순 보스라 전투 이후 도시를 항복시켰고 이 전투에서 130명의 이슬람교도들이 사망했다.

곧 이슬람교도들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15m(24km) 떨어진 아즈나데인에서 9만 명의 비잔틴군(동쪽 로마군)이 모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634년 7월 24일, 약 3만 2천 명의 이슬람 군대의 모든 사단이 아즈나데인에서 칼리드와 합류했다. 이슬람교도들은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지휘 아래 634년 7월 30일 아즈나딘 전투에서 그곳의 비잔틴 군대를 격파했다. 1주일 후, 아부 우베이다는 칼리드(Khalid)와 함께 다마스쿠스(Damascus) 쪽으로 이동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634년 8월 중순 야쿠사 전투에서 또 다른 비잔틴 군대를 격파했다. 다마스쿠스의 총독 칼로이스와 아즈레일은 또 다른 군대를 이끌고 칼리드의 군단을 저지했으나, 634년 8월 19일 마라즈알사파르 전투에서도 패배하였다.

다음날 무슬림들은 다마스쿠스에 도착하여 도시를 포위했고, 그 도시는 30일 동안 계속되었다. 다마스쿠스에서 20mi(32㎞) 떨어진 사니타알우카브 전투에서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보낸 비잔틴 증원군을 격파한 뒤 칼리드 군대가 공격해 시내로 진입했다. 칼리드 사단이 북동쪽에서 도시를 투자하면서, 헤라클리오스 황제의 사위라고 알려진 토마스는 634년 9월 19일 바브 알-자비야(자비야 문)를 포위하고 있던 우베이다에게 도시를 항복시켰다.

아부 우베이다는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에게 임명되어 다마스쿠스의 자비야 문을 포위했다.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다마스쿠스를 공격해 무력으로 정복한 후 다마스쿠스에 평화를 준 사람은 아부 우베이다였다. 아부 우베이다, 샤르젤 이븐 하사나, '암르 이븐 알-아스'는 칼리드의 동방문 공격 사실을 모른 채 그들에게 평화를 주었고, 칼리드는 마지못해 이를 지지했다. 비잔틴군은 사흘의 휴전을 받고 가족과 보물을 데리고 가능한 한 멀리 갈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다마스쿠스에 머물며 조공을 바치기로 동의했다. 이슬람교도들은 에메사로 가는 길을 통제했고, 그래서 비잔틴인들은 서쪽으로 갔다가 베카 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3일간의 휴전이 끝난 후, 칼리드 휘하의 무슬림 기병대는 짧은 에메사 길을 통해 비잔틴 기둥을 추격하여, 마라즈알데바즈 전투에서 안티오키아로 향하는 산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북서 베카 계곡에서 이들을 잡았다.[4]

우마르 시대

최고사령관에 임명

634년 8월 22일 칼리프 아부 바크가 죽고 우마르가 칼리프가 되었다. 우마르는 칼리드 이븐왈리드를 이슬람 군대의 지휘에서 해방시키고 아부 우베이다를 신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는 승리가 칼리드 덕분이라는 인상을 불식시키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칼리드는 노골적으로 관대한 사람이었는데, 어떤 사람들에 따르면 전투에서의 용맹에 대한 보상으로 병사들에게 선물을 주는 데 종종 돈을 낭비하곤 했다고 한다. 아부 우바이다의 임명 후 칼리드는 "오, 여러분보다 우마 관리인이 임명되었다"고 말했다. 이 말은 "음마마다 관리인이 있고 아부 우베이다가 이 엄마의 관리인이다"라는 무함마드의 말을 반영했다.

지휘 방식이 달라 '전투에서 전투로 이어지는 토네이도처럼' 돌진한다는 칼리드와는 달리 아부 우바이다가 느리고 꾸준히 움직이면서 작전 속도가 느려졌고, 기습과 대담함, 짐승 같은 무력으로 승리를 거뒀다. 시리아 정복은 새 사령관의 지휘 아래 계속되었다. 아부 우바이다는 가능한 한 곁에 두었던 칼리드의 충고에 크게 의지하곤 했다.

중부 레반트 정복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시리아 중부 침공 경로를 상세히 기술한 지도.

아부-우베이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직후 그는 베이루트 동쪽 자흘레 인근 현대 아블라 아부-알-쿠즈에서 열리는 연례 박람회에 소규모 분대를 파견했다. 그 박람회에는 비잔틴과 크리스천 아랍 수비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수비대의 규모가 무슬림 정보원들에 의해 잘못 계산되어 작은 이슬람 분대를 재빨리 에워쌌다. 완전히 파괴되기 전에 아부 우베이다는 새로운 첩보를 받은 칼리드를 보내 이슬람군을 구출했다. 칼리드는 그곳에 도달하여 634년 10월 15일 아부알-쿠즈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하고 박람회로부터 약탈당한 수많은 부츠와 수백 명의 비잔틴 포로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시리아 중부 지역을 점령한 무슬림들은 비잔틴인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시리아 북부와 팔레스타인의 소통은 이제 단절됐다. 아부 우바이다는 해발 약 500피트(150m)의 파엘(펠라)로 진군하기로 하고, 비잔틴의 강력한 수비대와 아즈나딘 전투의 생존자들이 있는 곳으로 진군하기로 했다. 여기서부터 비잔틴군이 동쪽으로 공격해 아라비아와의 통신선을 끊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지역이 결정적이었다. 더구나 이 거대한 수비대가 후방에 있어 팔레스타인은 침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슬림 군대는 팔로 이동했다. 비잔틴군은 결국 서기 635년 1월 23일 팔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에메사 전투와 제2차 다마스쿠스 전투

팔레스타인과 요르단의 핵심 열쇠가 될 전투가 끝난 뒤 무슬림 군대는 분열됐다. 샤르지엘과 암르의 군단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다. 한편 비교적 규모가 큰 부대를 거느린 아부 우베이다와 칼리드는 레바논을 거쳐 레바논과 시리아 북부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회교도들이 파hl에 점령되어 있는 동안, 기회를 감지한 헤라클리우스는 재빨리 테오도르 트리티리우스 장군 휘하의 군대를 파견하여 작은 회교도 수비대가 남아 있던 다마스쿠스를 탈환했다. 헤라클리우스가 이 새로운 군대를 파견한 직후, 팔에서 사업을 마친 무슬림들은 에메사로 가는 길이었다. 비잔틴군은 마라즈알롬에 있는 에메사로 가는 도중에 이슬람교도들을 만났다. 밤중에 테오드라는 이슬람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기 위해 그의 군대의 절반을 다마스쿠스로 보냈다.

칼리드의 첩자는 아부 우베이다로부터 허가를 받은 칼리드가 기동대 경비원과 함께 다마스쿠스를 향해 질주했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렸다. 아부 우바이다가 마르즈 아르 럼 전투에서 비잔틴 군대를 격파하는 동안 칼리드는 기병대와 함께 다마스쿠스로 이동해 제2차 다마스쿠스 전투에서 테오드라스를 공격하고 격파했다.

일주일 후 아부 우베이다 자신은 목성의 대 신전이 서 있는 바알베크(헬리오폴리스) 쪽으로 이동했다. 바알벡은 별다른 저항 없이 무슬림 통치에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합의했다. 아부 우바이다는 칼리드를 곧장 에메사를 향해 보냈다.

에메사와 찰시스는 1년간 평화를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 아부 우바이다는 그 제의를 받아들였고 에메사와 찰시스 지방을 침공하기보다는 정복된 땅에서 통치를 공고히 하고 마하라트 알누하마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평화 조약은 헤라클리우스의 지시에 따라 이슬람교도들을 유인하고 시리아 북부(현재의 레바논, 시리아, 터키 남부)의 방어 준비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티오키아에 대규모 군대를 징집한 헤라클리우스는 그들을 보내 에메사와 찰시스 같은 시리아 북부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강화시켰다. 비잔틴 군대가 도시에 도착하면서 평화 조약이 위반되었고, 이에 따라 아부 우바디야와 칼리드는 에메사로 진군했으며, 칼리드의 진격대를 저지한 비잔틴군은 패배하였다. 이슬람교도들은 636년 3월 6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마침내 정복된 에메사를 포위했다.

야르무크 전투

야르무크 전투 전 무슬림과 비잔틴 군대 이동

에메사를 포로로 잡은 뒤 무슬림들은 북쪽으로 이동해 시리아 북부 전체를 포로로 잡았다. 선발대 역할을 맡은 칼리드는 이동경비를 데리고 시리아 북부를 급습했다. 칼리드는 샤이저에서 찰시스를 위한 식량을 챙기는 호송대를 가로챘다. 포로들은 심문을 받고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시리아를 탈환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그에게 알렸다. 그들은 그에게 아마도 20만 명의 강군이 곧 그들의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칼리드는 거기서 멈췄다. 그의 과거 경험 이후 헤라클리우스는 이제 이슬람교도들과의 투구 싸움을 피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주요 도시에 대규모 증원군을 파견하고 무슬림 군단을 서로 고립시켜 따로 이슬람 군단을 포위하고 파괴할 계획이었다. 시리아를 후퇴시키기 위해 636년 6월에 5개의 대규모 군대가 발사되었다.

헤라클리우스의 계획을 눈치챈 칼리드는 무슬림 군대가 고립되어 파괴될 것을 우려했다. 전쟁 협의회에서 그는 아부 우바이다가 비잔틴인들과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기 위해 모든 무슬림 군대를 한 곳으로 끌어들이라고 제안했다. 칼리드의 제안에 따라 아부 우바이다는 시리아의 모든 이슬람 군에게 정복된 땅을 피난시키고 자비야에 집중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기동은 헤라클리우스의 계획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는데, 그는 자신의 부대를 이슬람교도들과의 공개적인 전투에 참여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 전투는 경 기병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자비야로부터 칼리드의 제안에 따라 아부 우바이다는 이슬람군에게 기병을 사용할 수 있는 야르무크평야에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이슬람 군대가 야르무크에 집결하고 있는 동안 칼리드는 비잔틴 진격대를 가로채서 격파했다. 이것은 이슬람교도들이 정복된 땅에서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무슬림 군대는 636년 7월에 그곳에 도착했다. 1~2주 후인 7월 중순경 비잔틴군이 도착했다. 비잔틴 최고사령관 바한은 가사니드 왕 자발라 이븐 알아이함의 기독교 아랍군을 파견하여 무슬림들의 힘을 점검했다. 칼리드의 이동수비대가 기독교 아랍인들을 무찌르고 격파했다; 이것이 전투가 시작되기 전의 마지막 행동이었다. 다음 달 동안 양군간에 교섭이 계속되었고 칼리드는 비잔틴 진영으로 바한을 직접 만나러 갔다. 한편 무슬림들은 칼리프 우마르가 보낸 지원군을 받았다.

마침내 8월 15일 야르무크 전투가 벌어졌고, 6일간 지속되어 비잔틴인들에게 참혹한 패배로 끝났다. 야르무크 전투는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비잔틴의 운명을 봉합한 것은 역사적인 패배였다, 패배의 규모가 너무 강렬해서 비잔틴은 결코 그것으로부터 회복할 수 없었다. 그것은 비잔틴 제국 전체를 이슬람교도들에게 취약하게 만들었다. 이 전투는 그때까지 시리아 땅에서 벌어진 전투 중 가장 위대한 전투였으며 아부 우베이다의 전술적 경이였다.

예루살렘 사로잡기

비잔틴 군대가 산산조각 나고 대패하자 무슬림들은 야르무크보다 먼저 정복한 영토를 재빨리 탈환했다. 아부 우베이다는 칼리드 등 고위 지휘부와 회의를 열어 향후 정복을 결정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기로 결정했다. 예루살렘 포위전은 4개월 동안 계속되었고, 그 후 도시는 항복하기로 동의했지만, 직접 우마르를 칼리프할 뿐이었다. '암r ibn al-'As는 칼리드를 칼리프로 보내야 한다고 제안했는데, 그 이유는 우마르와 아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칼리드는 인정을 받았고 결국 우마르가 왔고 예루살렘은 637년 4월 항복했다. 예루살렘에 이어 무슬림 군대는 다시 한 번 해산했다. 야지드의 군단은 다마스쿠스로 가서 베이루트를 사로잡았다. 암르와 슈라빌의 군단은 팔레스타인의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계속 나아갔고, 아부 우베이다와 칼리드, 1만7천명의 강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시리아 북부 전체를 정복했다.

아부 우베이다는 지휘관 '암르 이븐 알-아스', 야지드 이븐 아비 수피얀, 슈라빌 이븐 하사나를 다시 자기 지역으로 보내 재장전하게 했다. 대부분의 지역이 싸움 없이 제출되었다. 아부 우베이다 자신은 칼리드(칼리드)와 함께 다시 한 번 시리아 북부로 이동해 1만7000명의 강군으로그들을 정복했다. 칼리드는 기병대와 함께 하질르로 보내졌고 아부 우베이다는 찰치스로 이동했다.

시리아 북부 정복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시리아 북부 침공 경로를 상세히 기술한 지도.

이미 에메사를 손에 넣은 상태에서 아부 우베이다와 칼리드는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비잔틴 요새였던 찰시스를 향해 움직였다.

디펜딩 에메사

야르무크 전투에서 참패한 후, 비잔틴 제국의 나머지 지역은 취약하게 남겨졌다. 군사자원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시리아에서 더 이상 군사적 재기를 시도할 처지가 아니었다. 헤라클리우스는 나머지 제국의 방어를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시리아 헤라클리우스에 점령된 이슬람교도들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자지라에서 온 기독교 아랍 부족들은 주로 세르세슘과 호트족과 부족들이 대규모 군대를 소집하고 에메사를 포위하기 위해 진군했다.[5] 아부 우바이다는 에메사에 대한 기독교 아랍인들의 대규모 침공을 격퇴하기 위해 고안한 복잡한 전략의 일환으로 시리아 북부에서 에메사로 모든 병력을 철수시켰고 칼리프 우마르는 아부 우바이다에게 자신의 야전 지휘관들을 에메사 외곽으로 보내 고국 자지라의 도시에 대항할 충분한 스플리터 병력을 파견하라고 지시했다. 에메사에 집중하는 적들의 초점을 돌리기 위해,[6] 적 아랍 기독교 부족들의. 그래서 Iyadh ibn Ghanm 하의 분열병력 638년 무슬림들은 잘 요새화된 것으로 판명된 Htt를 공격했다. 따라서 그들은 군대의 일부분을 남겨두고 도시에 포위를 가하고 나머지는 Circesium을 뒤쫓았다.[7]

애프터 에메사

이후 칼치스에서 비잔틴인들은 헤라클리우스의 고향 아르메니아인 아나톨리아와 그곳에서 아시아 지역의 수도 안티오크를 지키게 되었다. 아부 우바이다는 칼리드에게 정예 기병인 기동대를 보내 찰시스를 향하게 했다. 요새는 그들의 지휘관 메나스 휘하의 그리스군이 지키고 있었는데, 메나스는 황제 자신 다음으로 위신이 높다고 보고되었다. 전통적인 비잔틴 전술에서 벗어난 메나스는 칼리드와 맞서 이슬람 군대의 주요 요소들을 찰시스에서 동쪽으로 5km(3.1mi) 떨어진 하지르에서 주체가 합류하기 전에 파괴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우마르에게 칼리드 군의 천재성을 칭송하도록 강요한 하질르 전투로 알려져 있다. 우마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칼리드는 진정한 지휘관이고, 알라가 아부 바크르를 불쌍히 여기기를. 그는 나보다 사람을 더 잘 판단했다.[8]

아부 우베이다는 637년 6월 항복한 칼치스의 사실상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곧 칼리드와 합류했다. 이 전략적 승리로, 찰시스의 북쪽 영토는 이슬람교도들에게 개방되었다. 칼리드, 아부 우베이다는 북진 행진을 이어가며 637년 10월 필사적인 비잔틴군의 격렬한 저항 끝에 포로로 잡힌 알레포를 포위했다. 다음 목표는 비잔틴 제국의 아시아 존의 수도 안티오키아라는 화려한 도시였다.

안티오크를 향해 행진하기 전에 칼리드, 아부 우베이다는 아나톨리아로부터 도시를 고립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비잔틴군을 모두 제거하기 위해 북쪽으로 분리대를 보내 알레포에서 50km(31mi) 떨어진 수비대 마을 아자즈를 점령했고, 거기서부터 무슬림들은 동쪽의 안티오크를 공격했다. 제국의 전멸을 구하기 위해 무슬림 군대와 흔히 철교 전투로 알려진 안티오키아 수비대 사이에 절박한 전투가 벌어졌다. 비잔틴군은 야르무크와 다른 시리아군의 전투의 생존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패배한 후 비잔틴인들은 안티오키아로 후퇴했고 이슬람교도들은 도시를 포위했다. 헤라클레이오스 황제의 도움을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안티오크는 637년 10월 30일 모든 비잔틴 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안전하게 통할 수 있다는 조건을 달고 항복했다.

아부 우베이다는 칼리드를 북쪽으로 보내면서 남쪽으로 진군하여 라즈키아, 자블라, 타르투스, 그리고 반레바논 산맥 서쪽 해안 지역을 점령하였다. 칼리드는 북쪽으로 이동해 아나톨리아의 카즐 강(Kızılrrmak)까지 영토를 급습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무슬림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안티오크를 떠나 에데사로 간 뒤였다. 그는 알자지라와 아르메니아에서 필요한 방어를 주선하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떠났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는 도중, 는 붙잡힌 마라시 후 칼리드가 문비즈 쪽으로 남쪽으로 향하고 있을 때 가까스로 탈출했다. 헤라클리우스는 서둘러 산길을 택했고, 실리학자 게이츠를 지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안녕히 가세요, 나의 공정한 지방인 시리아와 긴 작별. 너는 지금 이교도의 것을 예술을 해라. 시리아여, 평화가 함께 하소서. 적들의 손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땅이 되리라.[9]

야르무크에서의 참혹한 패배로 그의 제국은 무슬림 침공에 극도로 취약했다. 군사 자원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더 이상 시리아로 다시 돌아오려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헤라클리우스는 나머지 제국의 방어를 위한 준비를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시리아에 점령된 이슬람교도들을 필요로 했다. 그는 대규모 군대를 소집하여 아부 우베이다의 본부인 에메사에 대항하여 진군한 알자지라의 기독교 아랍인들의 도움을 구했다. 아부 우바이다는 시리아 북부에서 에메사로 모든 병력을 철수시켰고, 기독교 아랍인들은 시리아를 포위했다. 칼리드는 요새 밖에서의 공개전투에 찬성했으나 아부 우베이다는 오히려 그 문제를 훌륭하게 처리한 우마르에게 보냈다. 우마르는 이라크에서 이슬람군 분리대를 파견해 침입한 기독교 아랍인의 본거지인 알자지라를 3개의 다른 경로에서 침공했다. 게다가 알카디야 전투에서 이라크에 파견된 야르무크의 베테랑인 카카 이븐 암르 휘하의 이라크에서 에메사로 파견된 또 다른 파견대가 파견되었다. 우마르 자신도 1,000명의 병사의 선두에 서서 메디나에서 진군했다. 기독교 아랍인들은 회교도들이 조국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포위망을 버리고 알자지라로 급히 철수했다. 이때 칼리드와 기동대원이 요새에서 나와 군대를 초토화시켜 후방에서 공격했다.

아르메니아 아나톨리아에서의 캠페인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시리아 침공 경로를 상세히 기술한 지도.

전투 후 우마르는 알자지라의 정복을 명령했는데, 서기 638년 늦여름까지 완성되었다. 이 승리에 이어 아부 우베이다는 칼리드(Khalid)와 이야드 ibn Ghanm(알자지라의 사칭자)을 보내 알자지라 북쪽에 있는 비잔틴 영토를 침공하게 했다. 그들은 독립적으로 진군하여 에데사와 아미다(다이야르바키아), 말라티아와 아르메니아 전역을 아라라트까지 점령하고 북부와 중부 아나톨리아를 습격하였다. 헤라클리우스는 이미 안티오키아와 타르투스 사이의 모든 요새를 버리고 무슬림 통제지역과 아나톨리아 본토 사이에 완충지대나 어떤 사람의 땅도 만들지 않았다.

우마르는 당분간 그의 군대가 아나톨리아로 더 깊이 침입하는 것을 막았지만 오히려 지금의 시리아 총독인 아부 우바이다에게 시리아에서의 통치를 공고히 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 우마르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와 로마인들 사이에 불벽이 있어서 그들이 우리 영토로 들어갈 수도, 우리가 그들의 영토로 들어갈 수도 없었으면 좋겠다.

칼리드가 군대에서 해임되고 이듬해 기근과 전염병으로 무슬림 군대는 아나톨리아를 침공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나톨리아와 아르메니아 원정은 칼리드 군생활의 종말을 고했다.

대기근

그 해 말 아라비아는 심각한 가뭄에 빠졌고, 많은 사람들이 가뭄과 그 합병증으로 인한 기아와 전염병 질병으로 죽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아라비아 전역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수십만 명)이 식량이 배급되고 있는 가운데 메디나에 모여들었다. 곧, 메디나의 식량 비축량은 놀라운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 무렵, 칼리프 우마르는 이미 그의 지방 주지사들에게 그들이 도울 수 있는 모든 관련 원조를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그런 편지 한 통이 아부 우바이다에게 급히 전달되었는데, 아부 우바이다는 즉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너희에게 카라반을 보내겠다. 그들의 한쪽 끝은 시리아에 있고 다른 한쪽 끝은 마디나에 있을 것이다.

그의 장담에 의하면, 아부 우바이다의 식자재 캐러밴은 처음으로 메디나에 도착했고, 4000마리의 낙타가 식량을 가득 채웠다. 압도적인 양을 감당하기 위해 우마르는 이를 메디나 외곽에 사는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아부 우베이다를 임명했다. 아부 우베이다의 아낌없는 원조와 노력에 따라 우마르는 4000명의 디나르를 적당한 급료나 감사의 표시로 제공했는데, 그는 그 행위가 신을 위해 행해진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암와스의 역병

가뭄이 든 지 9개월이 지났고 새로운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전염병은 시리아와 서부 이라크에서 발생했다; 그것은 시리아에서 가장 심각했다. 전염병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마르는 시리아를 순방하던 중 동료들의 조언에 따라 시리아 국경에서 돌아왔다. 아부 우베이다는 그곳에서 그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오 우마르, 알라의 뜻에서 도망쳐?

우마르는 이에 충격을 받아 슬픔에 잠겨 말했다:너 말고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나는 알라의 뜻에서 도망치고 있지만 알라의 뜻에서 도망치고 있다.

우마르가 시리아에서 돌아온 것은 무함마드가 절대적으로 안전하지 않는 한 전염병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지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부 우바이다는 에메사에 있는 그의 군대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것과 같은 전염병이 시리아 땅을 강타한 것은 그때였다. 그것은 인구를 황폐화시켰다. 칼리프 우마르는 아부 우베이다를 그의 후계자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그가 전염병 지역에 남아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우마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와 함께 아부 우베이다에 전령을 파견했다.

나는 네가 긴급히 필요하다. 만약 내 편지가 밤에 너에게 온다면, 나는 네가 동트기 전에 떠나기를 강력히 촉구한다. 이 편지가 낮에 당신에게 닿으면 저녁 전에 떠나 나에게 서둘러 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아부 우베이다는 우마르의 편지를 받고 '우마르가 왜 나를 필요로 하는지 안다. 그러나 그는 영원하지 않은 사람의 생존을 보장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우마르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내가 필요하다는 거 알아. 그러나 나는 이슬람교도들의 군대에 있고 그들을 괴롭히는 것들로부터 나를 구하고 싶지 않다. 나는 하나님이 원하실 때까지 그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 편지가 너희에게 닿으면, 너희의 명령에서 나를 풀어주고, 내가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하여라.[10]

칼리프 우마르가 이 편지를 읽었을 때 눈물이 그의 눈에 가득 찼고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아부 우바이다가 죽었느냐?"아니오, 그러나 죽음이 가까이 있소."라고 그가 대답했다. 칼리프 우마르는 그에게 또 다른 전령을 보내 만약 당신이 적어도 습도가 낮은 고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아부 우베이다는 자비야로 이사했다고 말했다.

아부 우바이다가 시리아를 떠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무함마드가 언젠가 페스트에 맞으면 국가로부터 어느 누구도 탈출해서는 안 되며, 국가 밖에서 어느 누구도 시리아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기 때문이다(검역).[11]

죽음

아부 우베이다는 자비야로 이사하자마자 페스트에 시달리게 되었다. 죽음이 그에게 달려들자, 그는 그의 군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충고해 줄게. 그러면 네가 항상 선한 길로 가게 될 거야. 기도해. 라마단 달은 금식한다. 사다카를 줘라. 하지음라를 공연하십시오. 단결하고 서로 지지하라. 너희의 지휘관들에게 진실하게 대하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숨기지 말아라. 인간이 천년을 살더라도 세상이 너를 망치게 하지 마라. 그는 여전히 나를 보는 이 상태로 끝날 것이다. 평화가 너와 신의 자비를 받기를.[12]

그 때에 는 무아드 이븐 자발에게 그의 후계자로 임명하고, 그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인도하라고 명령하였다. 무아드가 그에게 간 뒤에, 그 순간, 그의 영혼이 떠났다.

무아드는 일어나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 백성아, 그대는 한 사람의 죽음으로 고통 받고 있다. 하느님에 의하면, 모든 악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사람보다 사람들에게 더 성실한, 더 의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나님께 자비를 베푸소서 하나님께서 자비를 [10]베푸시리라

그는 기원전 639년에 죽었고 자비야에 묻혔다. 그의 야나자무아드자발(Muadh bin Jabal)에 의해 이끌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레거시

그의 외모는 두드러지고 날씬하고 키가 컸으며 얼굴은 밝았고 턱수염이 희박했다. 그를 보는 것은 즐겁고 그를 만나는 것은 상쾌했다. 그는 극도로 예의 바르고 겸손했으며 꽤 수줍어했다. 그러나 힘든 상황에서 그는 놀랄 만큼 심각하고 경각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는 무함마드 공동체의 아민 또는 관리인(Ummah)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압둘라 이븐 우마르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쿠라이시 지파에서 세 사람이 가장 두드러지고, 최고의 인격을 가졌으며, 가장 겸손했다. 그들이 네게 말을 걸면, 그들은 너를 속이지 않을 것이고, 네가 그들에게 말을 걸면, 그들은 너를 거짓말이라고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아부 바크르: 시디크, 웃만 이븐 아판, 아부 우베이다 이븐 알자라.

그는 다른 일부 사하바(무함마드 일행)와 비교했을 때 가장 수수한 의복을 선택하면서 소박한 삶의 방식을 택했다. When, during the conquest of Jerusalem, Caliph Umar had come to Syria, he was met by Khalid ibn al-Walid and Yazid bin abu Sufyan; Caliph Umar dismounted from his camel and threw sand at them while admonishing them that "it has not been even a year since you have come out of the hunger and hard life of Arabia and you have forgotten all the simplic시리아 황제들의 화려함을 보았을 때?"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는 두 남자가 우연히도 더 좋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때 그들은 이전에 익숙해져 있었다.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는 옷 아래에는 여전히 충분히 무장되어 있었으며, 이는 그들이 여전히 힘든 사막 생활의 실용적인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칼리프에게 안도감을 가져다 주었다. 비교적으로 아부 우베이다도 참석하였지만, 언제나 겸손한 옷차림과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우마르는 그를 보고 기뻐했고, 바로 그날 저녁 우마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전투술에 성공한 사람 아부 우베이다를 보았다(많은 부티에게 권리를 부여하며), 그는 침대 하나, 칼 하나, 그리고 집에는 소유물이 하나도 없었다. 방패를 달다 우마르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 아부 우베이다, 너는 집에서 스스로 위로할 만한 것들을 좀 마련해 놓았어야 했어. 아부 우바이다가 대답했다. "오, 우마르, 그걸로 충분해."[13]

레반트의 기독교인들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고 아부 우베이다에 크게 고무되었다; 두 기독교 부족인 바누 타누크바누 살리즈는 카스린 시를 정복한 후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더구나 아부 우바이다가 시리아에서 그의 신하로 살고 있는 비무슬림들에게 주는 안도감이 컸다. 그는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파라다이스가 일생 동안 약속된 10명 중 한 명으로 간주된다.[14]

이라크 쿠트 인근의 우베이다 자라 공군기지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가족

아부 우베이다의 가족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 그에게는 두 아들 야지드와 아내 힌두 빈트 야비르 이븐 와흐브 이븐 다바브 이븐 후제이르 이븐 아비르 이븐 이븐 '아미르 이븐 루웨이'가 있었다. 아내 와르자로부터 아들 우메르를 낳았으나 모두 어린 시절에 죽었다. 딸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남자 후손들은 종식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알리가르(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와 요르단, 레바논알자라 가족은 아부 우베이다와 팔레스타인으로 알려진 알카예엠의 가문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고 항목

메모들

  1. ^ 영어: 움마의 관리인
  2. ^ 비잔틴 제국레반트 정복에 의해 설립되었다.

참조

  1. ^ 쿠란 58:22
  2. ^ a b c Tabqat ibn al-Saad of Maggazi, 페이지 번호:62
  3. ^ 사히 알부하리 서적, 가즈와 사이프 알자라
  4. ^ 데드 링크, 데드 링크 2003년 2월 17일 웨이백 머신보관, 데드 링크, 데드 링크
  5. ^ Martasyabana, Ilham. "ABU UBAIDAH MEMPERLEMAH PEMBERONTAK ROMAWI DI SYAM amquoting Tarikh Ath-Thabari, 4: no. 50-52; Al-Bidayah wa An-Nihayah Ibnu Katsir; Vol.Conquest of Sham during Umar ibn al-Khattab, h. h. 230-231". WARTAPILIHAN.com. Warta Pilihan news agency. Retrieved 10 October 2021.
  6. ^ Tibbetts, Jann (30 July 2016). 50 Great Military Leaders of All Time. Vij Books India Pvt Ltd. p. 548. ISBN 978-93-85505-66-9.
  7. ^ Kathir, Ibn (18 October 2017). The Sword of Allah: Khalid Bin Al-Waleed, His Life and Campaigns. American Eagle Animal Rescue. p. 310. ISBN 978-1-948117-27-2.
  8. ^ 타프시어타바리: 제3권, 페이지 98.
  9. ^ 리건 2003, 페이지 167
  10. ^ a b 사하바: 아부 우베이다 이븐 알자라
  11. ^ "Medicine – Sahih al-Bukhari, Volume 7, Book 71, Number 624 – Hadith". www.theonlyquran.com.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2 December 2017. Retrieved 14 November 2021.
  12. ^ Singh, Nagendra Kr (2003). Prophet Muhammad and His Companions. Global Vision Publishing House. p. 119. ISBN 978-81-87746-46-1.
  13. ^ Ashaba volume no:4 페이지 no:12
  14. ^ Esposito, John L. (21 October 2004). The Oxford Dictionary of Islam. Oxford University Press. p. 5. ISBN 978-0-19-975726-8.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