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몽골에서의 행동 (1933-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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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골 운동 (1933-193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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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igerents | |||||||
중화민국 | |||||||
지휘관 및 지도자 | |||||||
류귀탕 (1933) 디먹동고무 (1936) 왕잉 (1936) | Feng Yuxiang (1933) 팡젠우 (1933) 상전 (1933) 류귀탕 (1933) 푸자오이 (1936) | ||||||
관련된 단위 | |||||||
중공군과 유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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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 |||||||
1933 1936 내몽골인 1만 명 6,000명의 중국 협력자들 30명의 일본어 고문 | 1933: 1936: ~45,000 | ||||||
사상자 및 손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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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골 전쟁은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청일 전쟁의 공식적인 적대 행위가 시작되기 전까지 일본 제국에 의해 계속된 중국 북부 침공의 일부였습니다. 1931년 만주 침공으로 괴뢰국이 탄생했고 1933년에는 넵카 작전으로 러허성을 중화민국에서 분리했습니다. 당구 휴전으로 더 이상 남쪽으로 진격하지 못하게 된 일본 제국군은 차하르와 쑤이위안이라는 내몽골 지방으로 시선을 돌려 중국 북부 완충국을 건설했습니다. 명백한 휴전 위반을 피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대리 군대를 사용했고, 중국의 저항은 처음에는 차하르의 항일 운동 세력에 의해서만 제공되었습니다. 전자는 내몽골군, 만주국 제국군, 한나라 의병에 포함되었습니다. 중국 정부군은 항일 저항에 노골적으로 적대적이었고 1936년 쑤이위안에서만 일본의 침략에 저항했습니다.
배경
1933년 2월, 관동군은 일본군의 성공적인 레허 침공 이후 소규모의 일본군 분견대와 훨씬 더 큰 만주국 제국군을 떠나 동쪽 레허 국경을 감시하는 한편, 일본군의 균형은 만리장성에서 중국군과 교전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1933년 4월, 중국군의 지원군을 만리장성으로 철수시키기 위해 일본군의 명령을 받은 류귀탕 장군이 돌로노르 지역의 동남부 차하르 지방으로 건너갔습니다. 별다른 저항을 받지 못한 유비는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페이를 향해 동쪽으로 더 나아가게 됩니다. 당시 일본의 작전으로 보도됐지만 [1]류 대사의 추가 진격은 일본의 명시적인 승인 없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베이징의 국민당 군사위원회는 푸즈오이 장군을 중국 제7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국경 경비를 제공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4월 말, 진격하는 일본군이 미윤에 접근하자 허잉친은 부조이의 군대를 급히 재배치하여 동쪽으로 북경의 방어를 강화하여 차하르 국경의 방어를 비워두었습니다. 일본군과 만주국군은 5월 11일 기회를 잡았고, 곧이어 류귀탕의 진격을 따라 돌론누르 지역을 점령한 뒤 1933년 5월 31일 당구 휴전이 체결되기 직전 구위안을 점령했습니다.
차하르 인민항일군
특히 중국의 도시에서는 당구조약의 조건이 여론을 격분시켰습니다.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내에서 장제스의 정책에 반대하는 중국 애국주의자들과 해외 화교들은 일본의 더 이상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비정규 군대, 즉 항일 연합 군대를 조직하고 지원하는 데 협력했습니다.
펑위샹 장군과 그의 전 부하 지홍창은 많은 전 국민군 부대를 모집할 수 있었습니다. 팡젠우는 중국의 나머지 지역에서 자원봉사자들을 모았습니다. 여기에 펑잔하이 휘하의 일본군과 만주 항일 게릴라군에 의해 레허에서 쫓겨난 현지 민병대와 현지 차하르 민병대, 그리고 뎀추그둥루브 휘하의 몽골군까지 가세했습니다. 일본의 협력자 류귀탕마저 편을 바꿔 항일 연합군에 합류했고, 수이원 도적단장 왕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33년 5월 26일 여러 지휘관 회의를 거쳐 펑위샹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하고 팡젠우를 부사령관, 지홍창을 일선 사령관으로 하여 차하르 인민항일군을 공식 선포했습니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병력은 6만에서 12만 명으로 추정되었는데, 펑위샹은 10만 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수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있는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총이나 다른 현대 무기들이 없었습니다.
항일연군운동
관동군은 항일연합군이 창설될 무렵 돌로누르에 대한 방어를 강화했습니다. 이 도시는 일본 제4기병여단과 포병부대의 2,000명 이상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도시 밖에 일본인들은 참호, 전선 통신망, 그리고 여러 줄의 장애물들로 연결된 32개의 블록하우스를 세웠습니다. 이 외곽 방어선은 리슈신이 지휘하는 만주국 군대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남쪽으로는 일본 제8연대가 돌로누르의 군대와 상호 지원을 위해 펑닝에 주둔했습니다.[2]
항일 연합군은 나날이 상황이 악화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6월 1일 일본 비행기들이 두시커우를 폭격했고, 6월 4일 바오창은 6월 5일 캉바오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함락되었습니다. 6월 21일, 펑위샹은 항일 연합군에게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세 개의 열로 반격을 개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6월 22일, 선봉대는 강바오에 접근했고, 몇 시간 동안 전투를 벌인 끝에 추이싱우 장군 휘하의 만주국군은 도망쳤고, 중국군은 도시를 다시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6월 말, 지홍창 휘하의 군대는 두 개의 군단과 함께 돌로누르를 향해 북동쪽으로 진격했습니다. 북군은 치싱우 휘하의 만주국 군대로부터 바오창을 탈환했습니다. 방전무 휘하의 남군단은 협력자 류귀탕 장군이 거느린 구위안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유비는 편을 바꾸라고 설득했고, 바상고원의 구위안 등을 전투 없이 항복시켰습니다.
동트기 전인 7월 8일, 지홍창은 돌로누르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도시 외곽의 두 외곽 방어선을 점령한 후 많은 사상자와 함께 뒤로 쫓겨났습니다. 후에 지씨의 병사들 중 일부는 비밀 공작원으로 변장하여 도시로 보내져 두 번째 공격을 위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이 두 번째 공격은 7월 12일 돌로누르를 다시 점령하여 일본-만주쿠오 군대를 차하르 지방에서 쫓아냈습니다. 7월 말, 펑위샹과 지홍창은 칼간에서 "동북 4성 회복 위원회"를 설립하여 최근에 설립된 괴뢰 국가 만주국에 대한 일본의 보유권을 위협하는 직접적인 도전에 나섰습니다.
항일 연합군의 최후
장제스는 공산주의자들이 항일연합군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고, 그것이 그의 권위에 대한 위협이라고 느꼈습니다.[3] 항일연합군이 선포되자 북경의 국민당 군사위원회는 칼간행 여객열차 운행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후 그들은 칼간에 장갑차를 가까이 보내고, 옌시산에게 펑진자이 휘하의 제42사단, 푸조이 휘하의 제35군, 팡빙쉰 휘하의 제3군을 포함한 차하르와의 산시 국경에 군대를 주둔시키도록 지시했습니다. 7월, 쉬팅야오 휘하의 청나라 제17군과 왕징주 휘하의 제87사단은 쑨뎬잉의 군대를 구원하고 베이징-수이위안 철도를 장악하여 항일 연합군에 대한 외부 공급과 강화를 막았습니다.
또한 장제스는 항일군 내부의 불협화음을 이용하여 첩보원을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소문을 내고 불화를 조장하고 일부 지도자들을 매수하거나 이를 쟁취하기도 했습니다. 강바오, 펑잔하이, 리중이, 탄즈신 장군은 결국 장나라로 망명했습니다. 덩원이 암살당했습니다.
일본은 8월에 차하르를 다시 침공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8월 8일 일본군은 구유안을 폭격하고 다시 구유안과 돌로누르를 공격했습니다. 지홍창은 일본군을 일시적으로 저지했지만, 장정봉쇄의 영향으로 식량, 의복, 탄약, 돈이 모두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펑위샹은 차하르 외곽에서 이들을 들여올 수 없었고, 지방 자체도 군사를 지원할 만한 자원이 부족했습니다.
펑위샹은 8월 5일 전보를 보내 항일 연합군을 공식적으로 해산할 것임을 알리고, 전국 정부에 송자원을 복귀시켜 그 과정을 감독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지금은 무급 상태이고,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며, 싸울 수단이 부족한 항일 연합군의 많은 장교와 병사들은 이제 쉽게 중국군에 입대하거나 해산하도록 설득되었습니다. 8월 18일 펑위샹은 사임하고 차하르를 떠났고, 돌로누르는 곧 일본군에게 다시 붙잡혔습니다.
송자원은 2개 연대를 지휘하는 루안쉬안우(전 5군단 사령관) 산두 수비대 사령관과 루안이 지휘하는 또 다른 연대의 부춘(전 24사단 사령관)을 지휘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장링윈(전 6군단장)은 바오창 수비대장이 되었고, 미율링(전 유격대장)은 2개 연대를 지휘하는 부관이었습니다. 황수중(전 18군단장)은 지방 게릴라 분견대 2개 대대를 지휘했습니다. 쑨량청(전 헤럴드 군단장), 류전동(劉 z東), 게릴라 지도자 탕주우(唐周wu)가 각각 연대장을 맡았습니다. 장리성은 차하르 자주국군을 해산하는 대가로 지방정부 고문직을 수락했습니다. 탄즈신, 장런제, 리중이는 북경지부 군사위원회의 지휘 하에 놓였습니다. 야오징촨, 송커빈 등의 단위는 축소 개편되었습니다.
팡젠우와 지홍창 휘하의 항일 연합군이 송나라의 활동으로 상당히 줄어든 상황에서, 팡젠우는 새 총사령관으로서 군대를 동쪽으로 두시커우로 명령했습니다. 지홍창의 부하들 중 일부는 쑤이위안을 거쳐 닝샤로 서쪽으로 이동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푸조이와 장링윤은 에르타지 동쪽을 추격하여 막았고, 동쪽은 두시커우에서 팡전우와 합류해야 했습니다.
9월 10일, 지홍창은 군사회의를 통해 윤저우( chic州)로 가서 팡젠우(方建武), 탕위린(唐 y林), 류귀탕(劉 gu堂) 등과 함께 군대를 재정비하기로 하고, 이름을 抗日讨贼军 '항일도둑 토벌 원정군'으로 바꾸고, 팡젠우는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당율린 부사령관, 류귀탕 우항로 사령관, 지홍창 좌항로 사령관. 남쪽으로는 민족주의 세력, 북쪽으로는 일본인들에 둘러싸여 두시커우를 떠나 북경을 향해 남쪽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지씨의 좌로군은 만리장성 동쪽의 화이루를 향해 헤이강을 통해 남쪽으로 진격했고, 팡젠우 휘하의 우로군은 만리장성 서쪽으로 바이강을 따라 남동쪽으로 진격했습니다. 양군은 9월 20일 만리장성을 넘었고, 9월 21일에는 지씨가 화이루를, 팡젠우가 미윤을 공격해 점령했습니다.
한편, 류귀탕은 성체원과 회담한 뒤 다시 일본 측으로 망명했습니다. 류씨는 치청,[4] 두시커우, 윈저우에 주둔한 3개 연대를 지휘하며 "동차하르의 반딧 진압 사령관"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류의 군대는 당나라 군대가 남은 항일 연합군을 따라 남쪽으로 가는 것을 막았고, 팡젠우와 지홍창은 혼자 계속했습니다.[5]
9월 25일, 팡젠우는 가오리잉을 공격하여 점령했습니다. 다음 날 일본 정찰기가 탕구조약 비무장지대에서 철수하라는 경고를 했고, 9월 27일 일본 항공기가 그의 진지를 폭격했습니다. 펑과 지씨는 남은 6,000명의 병력(대략 반은 비무장)을 세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진격을 계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0월 초, 지삼출의 군대는 창핑에서 상전, 관린정, 팡빙순의 군대와 마주쳤고, 더 이상의 진격을 막았습니다. 며칠 만에 그들은 항일 연합군을 포위했습니다. 식량과 탄약은 부족했지만, 팽과 지씨의 군대는 며칠 동안 격렬한 전투 끝에 샤오탕산에서 동쪽으로 탈출할 수 있었지만 큰 손실을 입고 다시 갇혔습니다. 나머지 4,500명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씨는 일본에 대한 반대를 계속하기 위해 텐진으로 가서 혼란 속에서 슬그머니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팡젠우는 홍콩으로 강제로 망명했습니다.[6]
뎀추그동루브와 내몽골 자치정부
1933년 9월, 차하르와 쑤이위안성의 몽골 왕자들은 쿠이화 북쪽의 바사할락으로 가서 수개월 동안 범몽골 자치 운동을 창설하려고 노력해온 뎀추그동럽 왕자와 함께 협의회에 모였습니다. 10월 중순, 서로에 대한 전통적인 의심에도 불구하고, 왕자들은 "내몽골 국가 연합"을 만들기로 동의했습니다. 그들은 내몽골의 자치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일본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난경에게 전했습니다. 이에 장제스는 몽골 지방 자치 정무 위원회의 설치를 허락했지만, 그 권한을 주장하기 위해 향후 1년간 수이원 지방 세력과 두 차례에 걸쳐 심각한 충돌을 벌이게 됩니다.[7]
관동군 사령관 미나미 지로 장군과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령은 내몽골 자치정부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1935년 4월 미나미 장군이 다나카 류키치 소령과 다른 장교를 보내 뎀추동루브 왕자를 면담했을 때는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1935년 6월 북차하르 사건과 그에 따른 친도이하라 협정은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협정으로 중국 제29군의 모든 부대가 창페이 북쪽에서 철수해야 했으며, 이는 차하르 지방에서 중국군을 거의 완전히 철수시키는 것과 맞먹었습니다. 공공질서는 경무기로만 무장한 경찰조직인 '평화보존단'에 맡겨야 했습니다. 중국인 정착민들이 차하르 북부로 이주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국민당의 활동도 금지되었고, 다른 모든 항일 단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35년 8월, 미나미 장군은 왕자가 일본과 긴밀한 협력을 약속한 뎀추동루브 왕자를 만났고, 미나미 장군은 재정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1935년 12월 24일, 미나미 장군은 리슈신 휘하에 2개 대대의 비정규 만주 기병대와 일본 비행기 편대, 그리고 몇 대의 전차를 보내 뎀추동루브 왕자가 차하르 지방 북부를 점령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차하르 북부의 6현은 평화보존단의 단 몇천 명만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리의 도움으로 내몽골군은 곧 이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1936~1937년 쑤이위안 운동
일본식 준비물
차하르 북부를 점령하기 전부터 일본 비밀요원들이 쑤이위안에서 활동하면서 불교 사제로 위장한 공작원들과 함께 라디오 방송국을 설치해 왔습니다. 이타가키 세이시로 장군이 관동군 총참모장으로 승진한 후, 스이위안 침공 계획이 추진되었습니다.
1936년 4월 말, 뎀추동럽 왕자와 리슈신은 서우추무신에서 타나카 다카요시 일본 특수부대 대장을 만났습니다. 내몽골, 칭하이, 외몽골 대표들도 참석해 '건국회의'로 불렸습니다. 내몽골과 외몽골, 칭하이성을 모두 아우르는 새로운 몽골제국을 만들자는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이 회의 결과 1936년 5월 12일 몽골군정(蒙古軍政府)이 수립되었습니다. 1936년 7월 만주국과의 상호원조협정이 체결되었고, 일본은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병행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뎀추그동루브 왕자는 일본군 고문의 도움을 받아 3개 기병사단에서 9개 사단으로 증원하여 군대를 증강하고 장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군은 동북군에서 탈취한 무기를 제공했지만 다나카는 몽골 지도자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여러 지역에서 무장 불량 부담금과 전과자들을 모집했습니다. 단결력도 없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무장도 제대로 하지 못한 이 비정규군은 사기와 응집력도 떨어져 자산이라기보다는 부채임이 드러났습니다. 왕잉 휘하의 한나라 의병은 충성심이 의심스러운[8] 중국군과 함께 새로운 내몽골군에 편입되었습니다.
일본군은 또한 창페이에 기지를 둔 일본 항공 및 지상 승무원들로 구성된 28대의 전투기로 "맹장 공군"을 창설하여 육군의 근접 항공 지원을 지원했습니다. 일본군은 또한 포병과 장갑차, 그리고 30대의 전차나 전차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남만주철도회사는 트럭 150대를 보내 수송연대를 구성했고, 만주국 정부는 통신장비를 보냈습니다.
중국어 반응
푸조이 장군은 장정이 끝난 후 중앙군을 산시성으로 이동시켜 그곳에 도착한 중국 홍군 부대를 공격한 장제스뿐만 아니라, 옌시산 산시성 총독에게 자신의 성군에 대한 지원군을 요청함으로써 예상되는 일본-내몽골군의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8월 9일, 옌은 68사단, 7, 8독립여단, 4개 포병연대로 구성된 왕징궈 휘하의 중공 19군을 파견했고, 9월 18일에는 중앙군이 1개의 대공포병대대를 파견했습니다.
10월 14일, 장제스는 옌서산에게 전보를 보내 당엔보와 중국 제13군(2개 사단), 그리고 멘빙월의 제7기병사단을 보내 쑤이위안을 강화할 것임을 알렸습니다. 10월 30일, 옌시산과 푸조이는 장제스를 만나 군사 상황을 평가하고 병력 배치를 결정했습니다. 11월 11일, 옌시산은 그의 군대를 기병군과 예비군, 세 개의 루트군으로 나누어 당엔보의 군대가 도착하는 대로 군대 배치를 완료했습니다. 그러나 1936년 11월 15일 일본이 먼저 공격했습니다.
쑤이위안 운동
쑤이위안 침공은 1936년 11월 14일 내몽골군 제7, 8기병사단, 왕잉의 대한의용군, 그리고 30명의 일본인 고문의 지원을 받은 레름, 차하르 및 기타 지역의 몽골 용병들이 홍고르트의 중국 수비대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며칠간의 전투 끝에 공격자들은 마을을 점령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11월 17일, 중국군의 반격이 침략자들을 놀라게 했고, 혼란스러운 퇴각으로 이어졌습니다. 푸조이 장군은 몽골의 혼란을 틈타 바일링미아오에서 몽골군 사령부 서쪽으로 측면 이동하여 공격하여 점령하고 몽골군을 진격했습니다. 왕과 그의 한나라 의병들은 배령먀오 근처에 트럭에 실려 들어가 반격을 시작했는데, 12월 19일 대부분의 공격자들이 포로로 잡히거나 전멸했습니다.
후폭풍
일본의 대리군의 패배는 많은 중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더 적극적인 저항을 추진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이 캠페인의 성공적인 결과 직후에 발생한 시안 사건은 아마도 이 사건에 의해 촉발되었을 것입니다.
쑤이위안에서는 이듬해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 이후 공개적인 적대 관계가 시작될 때까지 소규모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쑤이위안에서 패배한 후, 뎀추동루브 왕자는 군대를 재건해야 했습니다. 1937년 7월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일본의 도움으로 그의 군대는 8개 기병사단 2만 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차하르 작전과 타이위안 전투에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군 정규군과 내몽골 연합군이 쑤이위안성 동부를 점령했습니다.
참고 항목
메모들
- ^ 타임 (잡지) "하늘이 보낸 군대"] (1933년 5월 1일). 시간.
- ^ Guo Rugui, 第二部分:从“九一八”事变到西安事变抗日同盟军的抗日行动
- ^ Guo Rugui, http://www.xiaoshuo.com/readbook/00163571_18141.html 웨이백 머신 第二部分에서 아카이브된 2011-07-18: 从 "九一八"
- ^ Jowett pg.40
- ^ Guo Rugui 第二部分:从“九一八”事变到西安事变察哈尔民众抗日同盟军 1
- ^ Guo Rugui, 第二部分:从“九一八”事变到西安事变抗日同盟军的解体和
- ^ Lin, Hsiao-ting (2010), Modern China's Ethnic Frontiers: A Journey to the West, Taylor and Francis, pp. 43, 49, ISBN 9780415582643
- ^ Jowett pg.57
- ^ Guo Rugui, 第二部分:从“九一八”事变到西安事变 日本侵绥的战备企图和中日
참고문헌
- Jowett, Phillip S., Rising Sun, 1931-45, 일본 아시아 연합국의 군대, 1권: 중국과 만주, 2004. Helion & Co., Ltd., Willow Rd., 26, West Midlands, Solihull.
- 中国抗日战争正面战场作战记 (중국의 항일 전쟁 전투 작전)
- 궈러구이 편집장 황위장
- 장쑤성 인민출판사
- 발행일 : 2005-7-1
- ISBN 7-214-03034-9
- On line in Chinese: 中国抗战正向战场作战记
외부 링크
- 극동국제군사재판 제5장: 일본의 중국 침략
- 항전: 만리장성 전투, 펑위샹의 항일 연합군 1933-34
- 항일전쟁: 공산성 반대운동, 항일연합군의 활동 중단과 제19루트군의 항쟁
- 1933년 5월 1일 "하늘이 보낸 군대"
- 1933년 6월 5일 "Truce 대 구원"
- 타임 1933년 7월 24일 "프라이빗 슬라이스"
- 1933년 7월 31일 타임 "의리를 향하여!"
- 1933년 8월 14일 타임 "암살 밴드 수익"
- 1933년 8월 28일 타임 "트라이엄팬트 범프킨"
- 1933년 9월 4일 "Song Come Home"
- 1933년 10월 23일 "내몽골인을 위한 내몽골"
- 1933년 12월 11일 타임 "제네랄리시모의 마지막 빨대"
- 타임 1934년 2월 12일 "The Word is 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