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사바 충돌
2011 Sabha clashes2011년 사바 충돌은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에 충성하는 군대와 사막 오아시스 도시 사바를 통제하기 위한 반군 반카다피 세력 간의 일련의 충돌이었고 2011년 6월 발생한 리비아 내전의 일부였다.
배경
사바는 리비아 사막의 오아시스가 위치한 약 21만 명의 도시로서 중요한 군사기지가 있는 곳이다.[2] 인구의 대부분은 차드, 니제르, 수단에서 온 이주자들이다.[3] 이 이주자들은 1980년대에 카다피에 의해 리비아로 끌려와 그들의 지지를 보장하기 위해 고용과 지원을 제공받았다. 게다가, 이 도시에는 카다피가 속한 카다드파 부족의 많은 구성원들이 살고 있다.[4] 그 결과 2011년 2월 리비아 전역에서 시작된 반체제 시위가 내전으로 비화하면서 친가다피 정서의 거점도시로 여겨졌다.[2] 그러나 분쟁이 진행됨에 따라 많은 이주민들이 반군과 싸우기 위해 북쪽으로 가서 카다피의 주요 지지기반을 소진했다.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장한 젊은 지역 주민들과 알라드 술레이만 부족의 일원들이었다. 글래드 술레이만은 정권에 강한 원한을 품고 있다. 카다피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 그 부족의 일원들은 그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비난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많은 부족민들이 처형되고 투옥되었다.[3]
6월의 충돌
분쟁의 상당 부분 동안 비교적 잠잠한 상태를 유지한 후, 6월 초에 반정부 시위가 시내에서 일어났다.[2][4] 6월 8일, 정부군은 시위 군중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공중으로 발사했고, 그 단체들간의 격렬한 충돌에 불을 붙였다.[3] 반군 국가 과도기 이사회에따르면 반-가다피 아와라드 술레이만 부족민들은 6월 11일까지 이 도시의 여러 거리를 해방시켰다.[2] 반군들은 수크 알 나믈라의 주요 주택지구에 검문소를 설치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 반군들은 부분적으로 북부의 반군들의 무기에 의해 무장되어 있었다. 6월 12일까지, 이 도시의 주민들은, 북부에서 온 친 가다피 군대와 용병들이 반대 분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사바로 돌아오려고 애쓰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3]
7월 친가다피 집회
7월 8일, 카다피는 친카다피 집회에서 5만 명의 군중에게 연설했다.[5] 연설 도중 그는 유럽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6]
8월/9월
8월 23일, 사바에서는 더 많은 충돌이 일어났다. 바니 대령은 사바를 (가다피)[7]의 마지막 거점이라고 불렀다. 사바는 9월 말에 반(反)카다피 통제하에 들어갔다.
참조
- ^ 수단 군대가 리비아 남부 도시를 점령하다
- ^ a b c d e "Battles rage in western Libya". ABC News. 13 June 2011. Retrieved 13 June 2011.
- ^ a b c d Hadeel al-Shalchi, Maggie Michael (12 June 2011). "Libyan forces fight rebels on several fronts". Bloomberg Businessweek.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 November 2012. Retrieved 13 June 2011.
- ^ a b Shashank Joshi (13 June 2011). "Libya: Illusion of momentum as Nato campaign drags on". BBC.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7 June 2011. Retrieved 19 June 2011.
- ^ 리비아: 사바 반나토 집회
- ^ 카다피는 유럽에서의 공격을 위협한다.
- ^ "Battle for Tripoli". BBC News. 26 August 2011. Retrieved 24 August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