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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Feng Yan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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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ng Yanji (Chinese: 馮延己) (per the Zizhi Tongjian and the History of Song) or Feng Yansi (馮延巳) (per the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and Spring and Autumn Annals of the Ten Kingdoms (903-June 23, 960), alternative name Feng Yansi (馮延嗣), courtesy name Zhengzhong (正中), was a famed poet and politician of the Chinese Five Dynasties and Ten Kingdoms Period state Southern Tang, serving as a chancellor during the reign of Southern Tang's second emperor Li Jing (Emperor Yuanz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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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eng Yanji (Chinese: 馮延己) (per the Zizhi Tongjian and the History of Song) or Feng Yansi (馮延巳) (per the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and Spring and Autumn Annals of the Ten Kingdoms (903-June 23, 960), alternative name Feng Yansi (馮延嗣), courtesy name Zhengzhong (正中), was a famed poet and politician of the Chinese Five Dynasties and Ten Kingdoms Period state Southern Tang, serving as a chancellor during the reign of Southern Tang's second emperor Li Jing (Emperor Yuanzong). (en)
  • 馮 延巳(ふ えんし、ふう えんし、天復3年(903年)- 建隆元年5月27日(960年6月23日))は、中国五代十国時代の南唐の詞人。字は正中。広陵郡(現在の江蘇省揚州市)の人。またの名は延嗣。一説に名は延己だが、延巳を支持する方がやや多い。南唐の先主李昪・中主李璟に仕えた。南唐中主李璟の師父でもあり、同時に李璟の治世下で官は宰相に至った。父は南唐の吏部尚書で、弟のもまた著名な文人である。死後、忠粛と諡され、『陽春集』1巻があり、世に伝えられている。 馮延巳の詞風は清麗で、離別の情緒を写すのが上手く、高い芸術的完成度を持ち、李煜への影響は大きい。馮延巳・李煜は、北宋以降の詞風に直接影響したと認められている(→)。「吹皺一池春水(吹いて皺(しわよ)す 一池の春水)」の名句がある(→)。 (ja)
  • 풍연사(馮延巳, 903년 ∼ 960년 6월 23일)는 중국의 시인이자 정치인이다. 자(字)가 정중(正中)으로 광릉[廣陵,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양저우시(揚州市)] 사람이다. 그의 부친 풍령군(馮令頵)은 남당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인물로 그 덕분에 풍연사는 관직에 오르기도 전인 20여 세 때 열조(烈祖) 이변(李昪, 888∼943)을 알현할 수 있었다. 열조 이변은 그를 보고 학식과 예술적인 재능이 많으며 말솜씨가 좋다고 칭찬했는데 이를 계기로 풍연사는 비서랑(秘書郞)이 되어 훗날 원종(元宗)이 된 이경(李璟)과 교유할 수 있었다. 풍연사는 이경보다 열 몇 살이 많았지만 이경이 오왕(吳王)을 거쳐 제왕(齊王)이 될 때까지 줄곧 그의 막부에서 장서기(掌書記)로 지내면서 함께 교유했다. 이경은 신분이나 나이, 정치적인 관계를 넘어서서 문학적으로 소통했던 그의 소중한 친구였다. 남당은 열조 이변의 문예 정책으로 인해 한희재(韓熙載), 손성(孫晟), 강문위(江文蔚) 등 여러 인사들이 모여들면서 오대십국 가운데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성장한 이경 역시 독서를 좋아하고 시에 능했다 한다. 최고 통치 계급인 황제와 재상이 사를 짓고 즐기는 분위기는 사에 대한 인식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사의 창작을 활발하게 해 곧바로 사의 유행으로 이어졌다. 남당이 문학, 특히 사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 것은 이러한 두 사람의 문학적인 교유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풍연사는 재상을 네 차례나 지낼 정도로 득의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 실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관직 생활이 그다지 순탄하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풍연사는 진각(陳覺, ?∼958), 송제구(宋齊丘, 887∼959) 등과 한 당(黨)을 이루었는데 이들은 손성(孫晟), 강문위(江文蔚), 한희재(韓熙載) 등의 무리와 끊임없이 반목하고 갈등했다. 따라서 풍연사가 재상을 여러 번 역임했다고 해도 그 재임 시기는 그다지 길지 않았고 재상으로 재임한 시기에도 끊임없이 그들의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또한 남당이 강남(江南)의 경제적인 부를 기반으로 해 사회경제적으로는 부유하고 여유로웠지만 크게 보면 당송 교체기라는 혼란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불안하고 위태로웠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남당은 주변의 여러 나라들과 자주 영토 분쟁을 일으켰는데 이에 실패하면 그 책임을 지고 재상이 물러나야만 했다. 풍연사는 영토 분쟁에서 패배한 책임을 지고 세 차례나 재상직에서 물러났지만 번번이 다시 기용되는 강인한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957년 주(周)나라 군대에게 강북(江北) 유역을 잃게 된 책임을 지고 태자소부(太子小傅)로 물러나서는 끝내 복귀하지 못하고 960년 58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풍연사는 원종 이경과 후주 이욱이라는 두 황제의 지속적인 애정과 신뢰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에 걸쳐 있는 이러한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관직 생활 내내 막연한 불안감과 위기의식 속에 지낸 것으로 보인다. 몇몇 역사서에서 남당을 멸망으로 이끈 오귀(五鬼) 가운데 한 사람이라며 풍연사를 폄하하기도 하지만, 이는 역사를 기술하는 사관(史官)이 정치적으로 반목하던 반대파의 입장이나 권력투쟁의 승자인 송나라의 입장에 서서 서술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적으로 풍연사가 충신이든 간신이든 간에, 그의 사에는 임금에 대한 충성심과 시대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진지하고 깊이 있게 반영되어 있다. 풍연사 사를 통해 역사서에서 다루지 않는, 한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면모를 살펴보고 그에 대해 균형 잡힌 시선을 갖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ko)
  • 冯延巳(903年-960年),原名馮延嗣,一作冯延己,字正中,是五代时词人,广陵人。南唐时官至宰相,是南唐中主李璟的老师。他是南唐吏部尚書馮令頵的兒子,弟弟馮延魯亦是著名文人。死後谥号忠肅,有《阳春集》传世。 冯延巳词风清丽,善写离情别绪,有很高的艺术成就,对中主、後主影响很大。冯延巳、李煜被认为直接影响了北宋以来的词风。冯延巳所著的詞有《謁金門》,第一句為“風乍起,吹皱一池春水”。 (z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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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eng Yanji (Chinese: 馮延己) (per the Zizhi Tongjian and the History of Song) or Feng Yansi (馮延巳) (per the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and Spring and Autumn Annals of the Ten Kingdoms (903-June 23, 960), alternative name Feng Yansi (馮延嗣), courtesy name Zhengzhong (正中), was a famed poet and politician of the Chinese Five Dynasties and Ten Kingdoms Period state Southern Tang, serving as a chancellor during the reign of Southern Tang's second emperor Li Jing (Emperor Yuanzong). (en)
  • 馮 延巳(ふ えんし、ふう えんし、天復3年(903年)- 建隆元年5月27日(960年6月23日))は、中国五代十国時代の南唐の詞人。字は正中。広陵郡(現在の江蘇省揚州市)の人。またの名は延嗣。一説に名は延己だが、延巳を支持する方がやや多い。南唐の先主李昪・中主李璟に仕えた。南唐中主李璟の師父でもあり、同時に李璟の治世下で官は宰相に至った。父は南唐の吏部尚書で、弟のもまた著名な文人である。死後、忠粛と諡され、『陽春集』1巻があり、世に伝えられている。 馮延巳の詞風は清麗で、離別の情緒を写すのが上手く、高い芸術的完成度を持ち、李煜への影響は大きい。馮延巳・李煜は、北宋以降の詞風に直接影響したと認められている(→)。「吹皺一池春水(吹いて皺(しわよ)す 一池の春水)」の名句がある(→)。 (ja)
  • 冯延巳(903年-960年),原名馮延嗣,一作冯延己,字正中,是五代时词人,广陵人。南唐时官至宰相,是南唐中主李璟的老师。他是南唐吏部尚書馮令頵的兒子,弟弟馮延魯亦是著名文人。死後谥号忠肅,有《阳春集》传世。 冯延巳词风清丽,善写离情别绪,有很高的艺术成就,对中主、後主影响很大。冯延巳、李煜被认为直接影响了北宋以来的词风。冯延巳所著的詞有《謁金門》,第一句為“風乍起,吹皱一池春水”。 (zh)
  • 풍연사(馮延巳, 903년 ∼ 960년 6월 23일)는 중국의 시인이자 정치인이다. 자(字)가 정중(正中)으로 광릉[廣陵,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양저우시(揚州市)] 사람이다. 그의 부친 풍령군(馮令頵)은 남당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인물로 그 덕분에 풍연사는 관직에 오르기도 전인 20여 세 때 열조(烈祖) 이변(李昪, 888∼943)을 알현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풍연사는 재상을 네 차례나 지낼 정도로 득의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 실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관직 생활이 그다지 순탄하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풍연사는 진각(陳覺, ?∼958), 송제구(宋齊丘, 887∼959) 등과 한 당(黨)을 이루었는데 이들은 손성(孫晟), 강문위(江文蔚), 한희재(韓熙載) 등의 무리와 끊임없이 반목하고 갈등했다. 따라서 풍연사가 재상을 여러 번 역임했다고 해도 그 재임 시기는 그다지 길지 않았고 재상으로 재임한 시기에도 끊임없이 그들의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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