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이승만계 공화민정회와 5개 기간사회단체인 대한청년단, 대한독립촉성국민회(국민회), 대한노동조합총연맹, 농민조합연맹, 대한부인회이 주축이 되어 창당, 조직되었다.[9] 별도로 조선민족청년단 출신인 이범석(李範奭) 등의 원외세력이 원외 친여 세력이 역시 친이승만계 정당인 통일노농당을 발족시키고, 얼마 뒤 자유당으로 당명을 바꿔 두개의 자유당이 한 지도자 아래 탄생하였다.
1951년12월 17일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자유당("원외 자유당")이 탄생했다. 그러나 1951년12월 23일 소장파 의원들이 중심이 된 또 다른 자유당("원내 자유당")이 탄생했다.[15] 원내 자유당은 장면을 리더로 하는 일파와 장택상을 리더로 하는 일파가 존재했고, 원외 자유당은 이범석을 부당수로 선출한다.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의 이중적인 구조는 후에 장면의 탈당, 장택상의 탈당 등 연이은 탈당 이후 이승만이 이범석을 평당원화 시키면서 강제로 일치시킨다.
1952년7월 19일대전에서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범석을 공천하였다. 이승만은 이 전당대회에 메시지를 보내 후보 지명을 하지 말 것과 자유당에서 당수·부당수 이름을 제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16] 그러나 이는 발췌개헌안 자체가 이승만의 연임과 직선을 위한 것이 분명하였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또 하나의 흉계와 민의 동원 계획이었음을 시사하는 언명이었다. 직선제 개헌 파동을 전후해 차기에 출마할 의사가 없음을 수 차례 밝혔던 이승만으로서는 자신의 결정을 번의할 것을 요구하는 민의를 전국적으로 일으켜야만 했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재출마를 요구하는 탄원서에 350만명이 서명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과정을 거쳐 이승만은 1952년7월 24일 '본의'는 아니지만 민의 압력에 굴복하여 양보했다는 걸 밝히면서 자신의 입후보 등록을 허락하였다.[17]
그 계획의 또다른 목적은 이범석의 제거였다. 이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진 이상 이범석의 역할은 끝난 것이었다. 이범석은 당선을 확신하고 부통령에 출마하였지만, 이승만은 엉뚱하게도 선거 일주일을 앞두고 아직 입후보 선언도 하지 않았던 목사 함태영을 부통령 후보로 지지한다고 발표하였다. 목사 함태영은 당시 81세로 77세인 이승만보다 네 살 연상이었다. 이는 이승만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연장자를 부통령 후보로 선택함으로써 자기의 후계자 선택을 명백하게 회피했다는 걸 의미한다.[18] 함태영은 자유당 공천이 아닌 무소속 공천으로 부통령 후보자에 입후보하였다.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당원으로 이갑성, 백성욱, 정기원(鄭基元)이 동시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결국 자유당의 표는 부통령 후보에서 나뉘어 이갑성은 501,000표, 백성욱은 181,000표, 정기원은 165,000표를 얻었다. 자유당의 표는 부통령 후보에서 갈렸고, 노동운동가 전진한이 대한노총 대표 자격으로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302,000표를 받았고, 친(親) 이승만 성향의 대한국민당의 임영신까지 부통령 후보로 나서서 19만표를 가져감으로서 이범석은 181만 6,000표로 2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부통령은 무소속의 함태영이 294만 4,000여 표로 당선되었다.
원내자유당의 핵심 지도자였던 장면은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일부 원내자유당 의원들이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 했고, 일부는 내각책임제로 전환시킨 뒤의 국무총리로 선출하려 시도하였다. 일치되지 않은 원내자유당 일부 인사들의 반기는 실패했고 이승만의 눈밖에 난 장면은 자유당을 탈당해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했다.
자유당은 1952년 발췌 개헌을 통해 이승만에게 독재의 길을 터주게 되어 야당과 여론의 크나큰 비난을 받게 되었다. 자유당 창당 초기에 장택상 일파가 당에서 제거된 뒤 이범석의 족청계가 당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범석과 민족청년단계열의 영향력을 우려한 이승만은 자유당 공천으로 제3대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이범석 대신 장택상을 시켜 무소속의 함태영을 밀었다. 이후 이승만은 족청을 기반으로 당내 세력을 넓혀가는 이범석을 견제하기 위해, 이범석을 부당수에서 평당원으로 격하시키고, 이기붕을 당내 2인자로 끌어올렸다.
장택상은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가하였으나 호헌동지회에 속한 민국당 계열 의원들의 조봉암 입당 반대에 실망하여 다시 자유당으로 되돌아왔다. 이범석은 탈당하여 1956년 1월 공화당을 조직했으나 제4대 부통령 후보 출마를 고집하는 바람에 당이 와해되면서 다시 자유당으로 복귀했다.
이승만의 비서 출신으로 야심을 보이지 않던 이기붕이 자유당의 당권을 장악하였고, 이승만에 의해 인위적으로 거세, 세력이 위축되었던 이범석 일파 및 족청계열과 대립하였다.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뒤에도 일부 학생과 시민사회단체에서 자유당 후보자들의 공천과 출마를 반대하고, 방해하는 여론까지 존재했으나 자유당은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을 강력한 반공주의 야당으로 키우려던 미국은 자유당을 포기하고 민주당의 장면을 지지하게 되었다.
자유당은 제5대 총선을 앞두고 당명을 공화당이나 신정당으로 개칭하자거나, 아예 당을 해체하고 모두 무소속으로 선거를 치른 다음 신당을 결성하자는 쪽과 자유당의 당명은 물론 조직도 모두 유지하여 끝까지 당을 수호하자는 쪽으로 나뉘었다. 결국 1960년 6월 12일 임시 전대에서 반대파의 보이콧 속에서 신정당으로의 개명을 통과시키려 했으나, 전대에서 반대 의견이 많아 무산, 자유당은 당명을 지키게 됐다.[19]
이승만 퇴진 후에도 자유당은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상당기간 동안 야당으로 존재하였다. 1961년5·16 군사 정변 이후엔 해산됐지만, 1963년 정치활동이 허용되고 나서 민주공화당, 민정당 등에 흡수되었고, 일부는 자유당이라는 당명을 그대로 해 1963년9월장택상을 총재로 재창당했다.[20] 그러나 민우당을 창당한 이범석, 정민회를 창당한 변영태, 추풍회를 창당한 오재영, 민주공화당이나 민정당 등 다른 당에 참여한 김법린, 이활 등 자유당은 여러 갈래로 분열된 상태였고, 장택상을 필두로 창당된 자유당은 구 자유당 세력의 일부만을 대표했다. 제6대 총선에서 지역구 후보 41명, 전국구 후보 4명을 내는 등 야당으로 활동했으나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였고,[21] 1964년 장택상의 탈당 이후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장택상은 이후 민중당, 신한당, 신민당 등 민주당계 정당에 몸담다가 1967년 자유당으로 복당했다.). 제6대 대선 때는 이범석 등을 대통령 후보로 낼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나[22], 끝내 무산되었고[23], 제7대 총선에서도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며 참패했다. 1970년신민당에 흡수되어 해체되었다.
↑Hwasook Nam, 편집. (2009). 《Building Ships, Building a Nation: Korea's Democratic Unionism Under Park Chung Hee (Korean Studies of the Henry M. Jackson School of International Studies)》.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39쪽. ... Political parties of the time, including Syngman Rhee's extreme right-wing Liberal Party (the Chayudang, which was established in 1951), seem to have felt obliged to include the goal of building a democratic and equitabl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