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광해군(光海君, 1575년 6월 4일(음력 4월 26일)~1641년 8월 7일(음력 7월 1일))은 조선의 제15대 국왕(재위: 1608년 ~ 1623년)이다. 임진왜란 때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분조[1]하여 의병을 이끌었다. 즉위 후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 노선을 취하였으며 전후 복구와 대동법의 실시 등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지만, 잦은 옥사와 중립외교,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유폐한 일로 인해 서인이 주도한 능양군반정(1623)에 의해 폐위되었다.[2] 연산군에 이어 반정으로 인해 폐위된 두 번째 왕이기도 하다.
광해군
光海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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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묻힌 광해군묘 | |
제15대 조선 국왕 | |
재위 | 1608년 2월 2일 ~ 1623년 3월 14일 (음력) |
즉위식 | 정릉동 행궁 서청 |
전임 | 선조 |
후임 | 능양군 |
조선국 왕세자 | |
재위 | 1592년 4월 29일 ~ 1608년 2월 2일 (음력) |
전임 | 순회세자 |
후임 | 폐세자 이지 |
이름 | |
휘 | 이혼(李琿) |
존호 | 체천흥운···창도숭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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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출생일 | 1575년 4월 26일(음력)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641년 7월 1일(음력) | (66세)
사망지 | 조선 전라도 제주목 |
부친 | 선조 |
모친 | 공빈 김씨 |
배우자 | 폐비 유씨 |
자녀 | 1남 1녀 (3남 1녀,성별 미상 자녀 1명)
폐세자 이지, 폐옹주 이씨 |
능묘 | 광해군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
성은 이(李), 휘는 혼(琿),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이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 때에는 특별히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부왕의 견제로 호성원종공신이나 선무원종공신에도 책록되지 못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었고,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힘썼다. 임진왜란 동안 세자의 몸으로 부왕을 돕고 전쟁 승리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부왕의 인정과 칭찬은커녕 견제와 냉대를 받아야만 했다.[3]
임진왜란 이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금과의 전쟁 위기 상황에서 실리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위 옹립에 공이 컸던 대북파의 반발로 당쟁에 휘말리고 말았으며, 이후 서인이 주도한 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이후 줄곧 인목왕후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했다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이유로 패륜자, 혼군(昏君), 폐주(廢主)로 평가되어 왔으나,[4] 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5][6]
생전에 폐위되었기에 사후 시호는 없으며, 임금이었을 때 신하들이 올린 존호는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이다.[7]
어린 시절
편집출생과 성장
편집1575년에 태어났으며 선조와 김희철의 딸 공빈 김씨의 서차남으로 위로는 친형 임해군 이진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광해군(光海君)에 봉해졌다. 어려서 생모 공빈 김씨를 여의고 부왕의 냉대 속에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김희철마저도 임진왜란 중에 전사하면서 그가 기댈 곳은 없었다. 선조에게 적자가 없는 데다, 서장남인 임해군이 포악하고 인망이 없어 서차남이었던 광해군이 159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야사에 따르면, 선조가 아들들을 불러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더니, 다른 왕자들은 각기 다른 대답을 하였지만, 광해군은 소금이라 대답하여 세자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기뻐했던 부왕 선조는 왕자들도 특별히 광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하여 원종공신록에 넣는다. 광해군도 이때 친형 임해군 진, 이복동생 신성군 후, 정원군 부, 순화군 보 등과 함께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다.
세자 건저의 문제
편집선조의 정비 의인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서자 중에서 왕세자를 선택해야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조는 후궁 인빈 김씨를 총애했기에 그녀의 아들인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8][9] 선조에게는 장성한 여러 왕자들이 있었으나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 등은 성격이 흉폭하여 불가하였고,[10] 자질로 따지자면 광해군이 유력했다. 그러나 방계승통에 서얼이라는 열등감이 있었던 선조는 광해군이 정비에게서 나온 적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었다.
1591년, 선조의 나이가 어느덧 40세에 이르자 대신들은 더 이상 후계문제를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여 세자책봉 문제를 논의했다. 논의 끝에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류성룡, 좌의정 정철 등은 함께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주청하기로 결정했다.[11] 그러나 동인의 영수 이산해는 이를 이용해 계략을 꾸몄다.[12] 선조가 신성군을 영두에 두고 있음을 알았던 이산해는 이번기회에 지난번 기축옥사(1589)로 동인들이 당한것에 대한 보복과 더불어 정철과 서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산해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 동의 한 뒤,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에게는 서인들이 신성군을 죽이려 한다고 은밀히 전했다.[13] 이런 사실을 선조는 인빈 김씨를 통해 전해 듣게 되었다. 또한 이산해는 병을 핑계삼아 주청을 하기로한 날에 경연에 불참하였다.[8]
이산해가 계략을 꾸미는 줄도 모르고 정철은 경연중에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했다. 선조는 진노하며 정철을 파직시키고 유배를 보내버렸다.[14][15] 이후 유성룡을 좌의정으로 올리고 서인을 멀리하며 동인들을 가까이 두었다. 선조가 정철과 서인의 처결문제를 동인들과 의논을 할때에 동인들은 의견이 갈려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되었다.[16] 남인들은 온건한 처결을 주장했으나, 북인들은 강경한 입장을 표방했다. 지난 정여립의 모반사건(기축옥사 1589)때 정철 등 서인들에게 크게 화를 입은 동인들이 북인 붕당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이번 기회에 복수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기축옥사때 서인들이 동인을 누르고 집권했었으나 이번 일로 인해 동인들이 다시 득세하였다. 이후 세자책봉 문제는 거론할 수 없는 금기 사항이 되었다.[17]
세자 시절
편집임진왜란
편집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세자 책봉 문제가 거론되지 못했다. 그러나 신성군이 피난길에 죽고 분조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선조는 6월에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18]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은 성격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다는 이유로 세자 책봉에서 제외되었다. 광해군은 전쟁 중에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된 뒤 선조가 피난 가고 없는 궁을 지키면서 전란 수습을 했다.[19]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는 한편, 민심을 위무하고 군량미를 모아 민중들의 신망과 지지를 받기도 했다.[20] 또한, 부왕의 정비인 의인왕후의 양자가 되어 세자로서의 위치를 표면상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세자책봉 승인을 거부했고,[21] 부왕 선조는 광해군을 심하게 경계하였다. 1598년 임진왜란이 종전되었지만, 신성군, 정원군 등을 호성공신에 추가 수록한 데 반해 광해군에 대한 포상은 기록에 없다.
왕위 계승
편집1600년에 의인왕후가 죽은후 1602년에 인목왕후가 선조의 계비가 되었다. 1606년, 그녀가 영창대군(적자)을 낳자, 부왕 선조는 광해군을 폐하고 적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22] 선조 자신이 서얼에다가 방계승통을 했다는 열등감으로 인해[23] 정국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때에 18세의 나이로 세자가 되어 분조(分朝)를 이끌며 고군분투하여 내외의 신망을 쌓은 광해군을 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24]
명나라는 지난 1604년(선조 37) 11월에 광해군에 대한 세자승인 거부 의사를 거듭 밝히기도 했다.[25][26] 또한 임진왜란을 거치며 정권을 잡은 북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유영경 등은 적통론과 광해군이 명나라의 고명(誥命)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내세워 영창대군 옹립을 지지하며 소북(小北)파를 이루었고, 정인홍 등을 중심으로한 대북파는 광해군을 지지하였다.[27]
1608년 지병이 악화된 선조는 영창대군이 너무 어린점을 들어 광해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교서를 내렸다. 그러나 유영경이 이 교서를 자기집에 감추었다가 후에 발각되었다.[28][29] 대신들이 유영경의 처벌을 주청하였으나 미처 처결을 결정하지 못한채로 선조가 갑자기 사망해버렸다. 독살설이 나돌기는 했지만 이는 인조반정후 반정세력이 퍼뜨린 것으로[30] 독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선조가 죽자 왕위계승 결정권은 인목왕후에게 넘어가게 된다. 유영경이 영창대군을 즉위시킨후 수렴청정 할 것을 청하였으나 인목왕후는 현실성이 없다는 판단하에 광해군을 즉위시킨다는 한글교서를 내렸다.[29][31] 1608년 음력 2월 2일, 광해군은 3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이후
편집즉위 초기
편집1608년 천신만고 끝에 즉위한 광해군은 이후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였다. 유영경의 세자 교체 기도에 대해 적극 반대하고 나섰던 대북파의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광해군을 정통으로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었다. 즉위 초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알고 억제하려 하였다. 남인인 영의정 이원익을 포함하여 북인에게 밀린 남인계 인사들과 서인계 인사들을 일부 등용하고, 소북파를 대북파 못지않게 대우하는 등 초기에는 당쟁을 수습하려고 노력했으나 대북파의 반발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유영경은 잇단 탄핵으로 처형되고, 소북파는 대북파의 견제를 끊임없이 받으며 조금씩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32]
산림 숭용 정책을 추진하고 재야의 선비들을 채용하려 하였으나 곽재우, 정인홍 모두 고사하거나 취임 후 사직 상소를 한 후 내려가 실패하였다. 그러나 정인홍은 뒤에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관직에 올라 북인 정권의 막후 실력자가 된다.
일본과 수교
편집1609년에 일본과 수교를 단행하여 교정상화 조치를 취했다.[3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선조 31)에 죽은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은 임진왜란에 반대하여 군사를 파병한 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수교를 요청하했다. 그는 대마도주(對馬島主)를 내세워 1599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외교 교섭을 끈질기게 요청해왔다. 조정 대신들간에 찬 ·반 양론이 대두되었으나 일본측이 매우 적극적으로 나오자 일본의 진의 파악하고자 노력한후 조선에게 유리한 조건 아래 허용하는 안을 추진하였다.[34] 광해군은 수교의 선행조건으로 국서를 일본이 정식으로 먼저 보낼것과 임진왜란 중에 성종, 정현왕후, 중종의 무덤 훼손한 범인 인도 등을 요청했는데, 일본이 이를 충실히 이행하자 교섭에 임하여 수교하였다.[35]
국방과 외교정책
편집광해군은 파주 교하가 군사적으로 방어에 유용할 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의 해상 교역이 가능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수도를 교하로 옮길 계획을 세웠으나 계속 미루어지다가 결국 시행되지 못했다. 광해군은 1618년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을 건국하자 북방의 성과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하는 등 국경 방비에 힘썼다.
1619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심양 지방을 공격하여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강홍립·김경서를 보내어 명군을 원조한다. 강홍립은 명나라군이 사르후, 상간하다, 아부달리에서 잇달아 패주하였다. 부차 전투(이상 3월)에서 조선군의 주요 지휘관이 전사하고 병력의 2/3가 괴멸하자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지를 후금에 전달하여 본의 아닌 출병 이었음과 전쟁을 원치 않는 다는 점을 후금에 알렸다. 이와 같은 실리외교를 펼쳐 후금과의 갈등을 피해갔다.[36]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펼치자 서인세력들은 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운 점을 망각하는 배은망덕한 일이라며 크게 반발하였다. 1622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가도의 주둔하자, 긴장감이 갈수록 높아졌다.
민생과 문화
편집임금이 된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궐을 지어 경제가 파탄나기 시작했다. 1608년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서 쌀로 조세를 내도록 함으로써 소득에 따라 세금을 내는 조세개혁인 대동법을 시행했다.[37] 1611년 양전 사업을 벌였다고 하나 선조 대의 계묘양전, 인조 대의 갑술양전 이외에는 양전을 시행한 기록이 없다. 이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재건하고 인경궁을 설치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서적 간행에도 힘써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했다.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한의학책인 《동의보감》 등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왕권 강화책
편집정적 숙청
편집1609년 광해군은 친형인 임해군을 교동으로 유배하여 죽였다. 1612년 김직재의 옥과 1613년 계축옥사가 발생하자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과 북인은 인목왕후의 의인왕후 능(陵) 저주설을 조작하기도 하였다. 김제남은 죽은 지 3년 만에 다시 부관참시되었으며 그 일족 또한 막내아들과 부인을 제외한 세 아들이 화를 당하였다. 임해군은 자신의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었다고는 하나, 광해군 자신의 유일한 친형제였고, 투명하지 못한 살해 과정으로 일부 신료들에게 의구심을 주기도 하였다.
1614년 광해군은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하였다가 얼마 후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죽였다. (방바닥을 매우 뜨겁게 만들어 열기 때문에 죽었다.) 1615년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인 능창군까지 폐서인하여 교동에 안치해버리고, 결국 목을 매어 자결하게 하는 등 왕권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런 처결은 훗날 서인에게 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광해군과 이이첨 일당은 영창대군 살해 시점 직후부터, 각종 조작설과 허균 등을 비롯한 강경파 관료, 유생들을 동원한 상소 릴레이를 펼치며 끊임없이 인목대비 폐비 공작을 전개하였다. 결국 인목대비를 1618년 폐비시켜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 사건으로 정국은 들끓었으며, 인조반정의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궁궐 복원 공사
편집무리한 토목 공사를 연이어 강행하여 궁궐 복원 등으로 백성들의 민심도 이반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광해군은 그동안 자신이 임진왜란 때부터 쌓아왔던 일반 백성의 민심을 점차 잃게 되었다.[38] 또한, 측근들의 월권과 부패가 문제시 되었으며, 궁궐 복원 과정에서의 자금 문제도 민심이반의 원인이 되었다. 광해군 집권 당시의 실권자 이이첨, 유희분, 박승종은 부원군 칭호의 '창'자를 따 3창 부원군이라 일컬어졌다. 일부 신하들과 후궁들 사이에서는 뇌물로 벼슬을 팔고 사는 비리를 저지르게 되면서 서인과 반정 세력에게 정치적으로 명분을 주게 되었다.
측근들의 권력 남용
편집광해군 재위 시절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이이첨과 상궁 김개시, 허균 등은 무수한 옥사를 일으켜 반대파 신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왕권을 위협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구축하게 되었다.[39] 이같은 행위들은 성리학의 도덕주의, 도의 정치, 왕도 정치를 기본 이념으로 삼던 조선 사대부들로부터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이이첨과 정인홍이 무리하게 능창군의 역모와 영창대군의 옥사를 주관하고, 1617년부터 인목왕후의 폐모론을 주장하는 것 역시 사림의 반발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
한편 옥사를 일으킨 또 다른 주역인 허균 역시 다른 주역인 이이첨, 김개시 등에게 처형된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당일 광해군은 처음 반정을 접하고 이이첨의 반역으로 오해하였으며, 한편 김개시는 인조반정 직전 정보가 누설되어 반정 세력들을 검거할 수 있었음에도 반정 세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광해군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등 광해군 정권에 결정적인 위해를 끼쳤다.
폐위와 말년
편집능양군반정
편집1623년 3월 14일 새벽, 서인들이 주도하고 남인들이 동조하여 인조반정이 발생한다. 이귀, 김류, 최명길, 김자점, 이괄 등과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은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장악했다. 이들은 광해군을 인목왕후 앞으로 끌고 갔는데, 인목왕후는 광해군과 폐세자에 대한 처형을 주장하였으나, 능양군과 반정 세력은 반정의 명분인 폐모살제(廢母殺弟)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반정을 마무리 짓게 된다.[40] 곧 반정군에게 이이첨, 정인홍, 김개시 등은 죽고, 40여 명의 관리가 구금된다.
폐세자와 유배
편집광해군은 폐위 후 왕비 유씨, 그리고 세자 지와 세자빈 박씨와 함께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고,[40] 울타리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 후인 5월 세자와 세자빈은 탈출에 실패하고 자결하게 된다. 그때 세자는 다리미와 큰 가위를 이용해서 울타리 밑에 땅굴을 파고 도주를 시도하다가 발각되었고, 능양군은 그 소식을 듣고 한 달 뒤인 6월 사촌동생인 세자에게 자진을 명하고, 세자 질은 그 말에 따라 자진한다. 한편 세자빈 박씨는 남편이 잡히는 것을 보고는 나무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가 사흘 뒤에 깨어나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40] 그해 10월에 부인 유씨도 사망하는데, 유배 생활 중의 화병이 원인이었다.[41]
유배생활
편집1624년 이괄의 난 때 능양군은 광해군의 재등극을 우려해 그를 충청도 태안으로 옮겼다가 강화로 다시 옮겼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강화도 옆 교동도에 유배되었다.[40] 병자호란이 끝나고, 1637년(능양군 15년) 6월 6일, 광해군은 제주 어등포(魚登浦 : 현 구좌읍 행원리)로 입항하였다. 다음날 6월 7일 광해는 제주 주성 망경루(望京樓 : 구 제주세무서) 서쪽 또는 제주 서성(西城) 안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는데,[42][40] “두문(杜門)하여 자물쇠로 봉한 후 도사(都事) 등 5인은 서울로 올라갔고 속오(束伍) 유진군(留鎭軍) 중에서 30명이 윤번으로 수직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광해군은 제주에 유배생활을 하면서 외부 출입이 차단된 채 엄격히 통제된 생활을 하였다.[40][42]
후금(청나라)측에서 정묘호란의 명분으로 광해군의 폐위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였다. 이후 몇 차례 역모 사건에 거론되었는데, 심지어는 광해군 스스로 친필 밀서를 역모 세력에게 전달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능양군과 집권 서인은 그를 죽이지 않고 천수를 누리도록 하였다. 한편 유배지에서는 상궁과 포졸들로부터 영감이라는 모욕적인 호칭을 듣기도 했다.
사망
편집유배 생활을 지내던 광해군은 1641년(능양군 19년) 7월 1일에 67세를 일기로 독살로 인해 사망하였다. 한편 그가 죽은 시기인 음력 7월 1일 무렵에 제주도에 비가 자주 오는데, 이를 “광해우”라 칭하기도 한다.[43][44] 장례는 박씨 집안으로 시집간 딸이 봉사하게 되었으며, 제주도에서 장사를 지냈으나 1643년 현재 위치인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337-4 로 이장하여[45][46] 부인 유씨의 묘와 쌍분으로 조성하였다. 그의 묘소는1991년 10월 25일에 사적 제363호로 지정되었다.[47]
광해군 사후에 그의 딸은 폐옹주되어 서인으로 전락하였으나 능양군의 말에따라 이현궁에서 지낼수 있었다.[48] 또한 20세 넘도록 시집을 못갔으나 능양군이 혼수를 마련해주어 박징원과 혼인하였다. 논밭, 집과 노비가 주어졌으며 광해군의 외손이 광해군의 제사를 모셨다 한다.[46]
현재 광해군묘는 문화재보호에 따라 여행관광 및 방문이 제한된 곳으로 광해군 제향식날에만 한시 개방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출입이 금지되기 때문에 방문을 원하면 문화재청 사릉 관리사무소에 사전문의나 출입신청을 해야 한다.[47]
사후 평가
편집반정 이후 조선 후반기 내내 친형 임해군을 죽인 패륜사건과 폐모살제(영창대군 살해와 인목왕후 폐위)를 이유로 연산군에 이어 패륜의 군주로 규정되어 왔다. 명나라와 후금의 전쟁 중 강홍립을 파견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점 역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배신하고 사대를 저버린 것으로 간주되어 반정(1623) 이후 조선 시대 내내 광해군은 폭군 또는 혼군(昏君), 즉 판단이 흐리고 어리석은 임금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49][50]
그러나 1933년에 이나바 이와키치가 《광해군시대의 만주와 조선의 관계》라는 저술에서 광해군이 실리외교 혹은 중립외교를 펼쳤다는 긍정적 평가가 등장하면서[49] 여러모로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폭군으로서의 이미지가 많이 희석이 되고 있다. 물론 내치의 붕괴로 인해 소극적인 외교를 펼친 결과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궁궐을 지어 경제가 파탄났다. 이 점은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명기 교수 조차도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 정책을 궁궐 공사로 모두 말아 먹었다" 라며 비판하고 있다.[51]
시조
편집제주도로 유배될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한다.[52]
風吹飛雨過城頭 (풍취비우과성두)
瘴氣薰陰百尺樓 (장기훈음백척루)
滄海怒濤來薄幕 (창해노도래박막)
碧山愁色帶淸秋 (벽산수색대청추)
歸心厭見王孫草 (귀심염견왕손초)
客夢頻驚帝子洲 (객몽빈경제자주)
故國存亡消息斷 (고국존망소식단)
烟波江上臥孤舟 (연파강상와고주)
궂은 비바람이 성머리에 불고
습하고 역한 공기 백 척 누각에 가득한데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 근심어린 기운이 맑은 가을을 둘러싸네
돌아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
나그네의 꿈에는 제자주(서울)가 자주 보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안개 자욱한 강 위에 외딴 배 누웠구나
풍취비우과성두 장기훈음백척루는 비바람이 치는 척박하고 초라한 귀양생활을, 창해노도래박막 벽산수색대청추는 그러한 척박함과 비교되는, 노도처럼 치는 푸른바닷물과 가을빛이 든 푸른 산 등의 자연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척박함과 푸름의 대비는 화자의 마음을 자연에 대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키며 화자내면 속에서는 푸른 자연과 같이 아름다운 도읍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기타
편집2002년 11월 15일에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사이버 조선왕조에서 광해군을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으로 추숭 복위하고, 그의 부인 유씨를 “혜장왕후(惠章王后)”, 능호를 열릉(烈陵)으로하여 추숭하였으나, 이는 사시(私諡)로서 국가적으로 공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받지는 않는다.[53] 일부 한자문화권 사이트에서 광해군을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54][55]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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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편집
왕비편집
후궁편집
왕자편집
왕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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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등장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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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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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편집연극편집
뮤지컬편집
웹소설(웹툰)
시사 교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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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화재
편집- 광해군 내외 및 상궁 옷 (중요민속문화재 제3호, 해인사 소장)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분조(分朝)는 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이다. 하나는 본래의 국왕인 선조가 이끌고, 상대적으로 소규모로 편성된 나머지 하나는 세자 신분이던 광해군이 이끌었다. 분조는 조정 기능이 분화된 것이기 때문에 분병조, 분호조 등의 관청과 분병조판서, 분호조판서 등의 관원이 배치되었다.
- ↑ KBS 역사스페셜 – 왕의 꿈, 왕의 조건, 조선 15대 왕 광해
- ↑ 한명기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역사비평사 2010년 1판21쇄 p6
- ↑ 한명기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역사비평사 2010년 1판21쇄 p9
- ↑ ‘왕의 얼굴’ 서인국, 임진왜란 속 용맹한 세자 광해 재조명
- ↑ [네이버 지식백과] 광해군묘 (답사여행의 길잡이 9 - 경기북부와 북한강, 초판 1997., 13쇄 201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김희균, 김성철, 유홍준, 문현숙, 정용기)......조선왕조는 광해군을 폭군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오늘날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시도되고 있다. 광해군은 재위 15년 2개월 동안 군주로서 매우 성실하고 탁월했으며, 대내적으로 소신과 안목을 갖춘 정책을 추진한 유능한 왕이었다. 그럼에도 광해군이 실정을 범한 것은 당리당략에 눈이 어두운 소북파의 끊임없는 계략과, 이에 정면 대응하려는 대북파의 책동이 계속된 데서 온 어쩔 수 없는 정치적 한계였다는 것이다.
- ↑ 《광해군일기》 광해 120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0월 30일(신유) 1번째기사
- ↑ 가 나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년 p108
- ↑ 이덕일 <조선왕을 말하다> 역사의아침 2011년 p113.....이건창이 쓴 '당의통략'은 조정 신하들은 광해군에게 뜻을 둔 반면 선조는 인빈 김씨 소생인 넷째 아들 신성군에게 뜻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 ↑ 이덕일 <조선왕을 말하다> 역사의아침 2011년 p112
-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년 p107
-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년 p107~108
- ↑ 최태응 <불륜의 조선사> 새벽이슬 2011년 p335
-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년 p109
- ↑ [네이버 지식백과] 건저문제 [建儲問題]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이산해는 그 약속을 어기고, 선조가 특히 사랑했던 후궁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오빠 김공량(金公諒)과 결탁하여, 인빈에게는 정철이 왕세자 책봉을 청하면서 인빈이 낳은 왕자인 신성군(信城君) 후(珝)를 죽이려 한다고 모함하였다. 인빈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선조는 크게 노하여 정철 등이 왕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하자 정철의 벼슬을 깎고,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백유성(白惟成)·유공진(柳拱辰) 등 서인을 모두 외직(外職)으로 쫓아버렸다. 동인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일어난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정철에게 원한을 품어, 건저문제를 서인에 대한 보복수단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년 p113~114
-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년 p126
- ↑ '선조실록'에는 4월 28일에 세자책봉이 이루어진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선조수정실록'에는 6월로 나와있다.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28일]....上微哂曰: "光海君聰明好學, 予欲立而爲國本, 於卿等意如何?" 大臣以下, 一時起拜曰: "宗社生民之福也.........[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6월 1일 기축 18번째기사]....命世子奉廟社分朝
- ↑ [네이버 지식백과] 광해군 [光海君]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세자 책봉 문제로 임해군과 갈등을 빚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영변(寧邊)에서 갈라졌다. 선조는 의주로 향하고 광해군은 권섭국사(權攝國事)의 직위를 맡아 분조(分朝)의 책임자로 평안도 지역으로 출발하였다.
- ↑ 한명기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역사비평사 2010년 1판21쇄 p52
- ↑ 이덕일 <조선왕을 말하다> 역사의아침 2011년 p116
-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년 p127
- ↑ 이순자 <조선의 숨겨진 궁가이야기> 평단문화사 초판2쇄 2011년 p36
-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2 > 한길사 2007년 p73
- ↑ 선조실록 181권, 선조 37년 11월 25일 신축 6번째기사
- ↑ 이덕일 <조선왕을 말하다> 역사의아침 2011년 p118
-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년 p128
-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년 p131
- ↑ 가 나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1996년 p303
-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년 p130
-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년 p132
- ↑ 신병주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년 p147
-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4년 p135
- ↑ [네이버 지식백과] 기유약조 [己酉約條]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 [네이버 지식백과] 기유약조 [己酉約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신병주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년 p152
- ↑ 신병주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년 p150
- ↑ 《광해군일기》 광해군 10년(1618년) 4월 2일 <영건도감에서 관동 지역의 벌목으로 인한 일로 아뢰다> 기사.
- ↑ 이이첨과 김개시의 숙청작업은 개인적인 원한이라는 설과 왕권 강화를 위한 다른 방편이었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 ↑ 가 나 다 라 마 바 광해군은 어떻게 제주에 유배 오게 되었을까, 이준후, 산업은행 제주지점장, 2010녀 7월 6일, 현대해상
- ↑ 광해군의 유배생활과 최후, 문화컨텐츠닷컴
- ↑ 가 나 '광해군'이 제주에 유배와서 죽었다고?, 오마이뉴스.
- ↑ 제주에 내리는 비 ‘광해우’…광해군의 제주 유배기억전, 한겨레.
- ↑ [쉿! 우리동네 광해 숨 거둔 날 유배지 제주선 가뭄에도 비오더라], 연합뉴스.
- ↑ [네이버 지식백과] 광해군묘 (남양주시 - 두산백과 두피디아)
- ↑ 가 나 이순자 <조선의 숨겨진 궁가이야기> 평단문화사 초판2쇄 2011년 p38
- ↑ 가 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남양주 광해군묘 (南楊州 光海君墓).....※ 남양주 광해군묘는 사적지 원형 보존과 훼손 방지를 위하여 비공개로 관리중입니다. 학술조사 등 목적으로 관람을 희망하실 경우에는 사전에 관리소(031-573-8124)에서 허가를 받은 후 출입 가능합니다.
- ↑ 이순자 <조선의 숨겨진 궁가이야기> 평단문화사 초판2쇄 2011년 p34
- ↑ 가 나 오항녕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북스 2012년 p06, p14
- ↑ 한명기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역사비평사 2000년 p139
- ↑ 한명기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역사비평사 2000년 p139~154
- ↑ <인조실록> 인조 19년(1641년) 7월 10일 <광해군이 죽다> 기사
- ↑ “사이버 조선왕조 서고의 <혜종대왕문서>”. 2018년 3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5월 8일에 확인함.
- ↑ 역대국군(歷代國君) 광해군 항목.
- ↑ 소후포털 백과사전 朝鲜光海君 항목.
- ↑ 세종의 8남 계양군의 현손
- ↑ 광해군 2년(1610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
- ↑ 인조 1년(1623년) 공빈으로 강등
- ↑ 인조반정후 삭탈
- ↑ 《조선왕조실록》인조 18권, 6년(1628 무진 / 명 천계 8년) 1월 3일(을축) 6번째기사.
- ↑ 《공사견문록》, 정재륜(鄭載崙)
갑자기 그 주인을 배반하고 신소원(辛昭媛)의 방에 가서 의탁하고 - ↑ 김려 작, 《한숙원전》
- ↑ 일명 김개시(金介屎). 선조의 승은을 입고 특별상궁이 되었으며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광해군의 후궁이 되기도 하였다.
- ↑ 『계축일기』에서는 '가히'로, 『연려실기술』과 『공사견문록』에는 각각 '개희(介姬)', '가시(可屎)'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또한 그녀의 이름 '개시(介屎)'는 기존에 흔히 알려져 있는 '개똥이'가 아니라 '가희'의 음차인 것으로 보인다.
- ↑ 《광해군일기(중초본)》 187권, 광해 15년(1623년 명 천계(天啓) 3년) (계묘)
상궁 김개시(金介屎)를 베었다.【개시가 정업원(淨業院)에서 불공을 드리고 있다가 사변이 일어난 것을 듣고 민가에 숨어 있었는데, 군인이 찾아내어 베었다.】
- ↑ 광해군일기121권,9년(1617)11월21일3번째기사
- ↑ 《광해군일기》[중초본] 80권, 광해 6년(1614년 명 만력(萬曆) 42년) 7월 4일 (갑인)
위급할 때 내전에게 옥교를 구해 보호한 심대의 공에 아들에게 가자하다 - ↑ 이이첨(李爾瞻)의 외손녀
- ↑ 《선조실록》 168권, 선조 36년(1603년 명 만력(萬曆) 31년) 11월 11일 (계해)
유시에 왕세자의 둘째 아들이 졸서하였다. 【마마를 앓았다. 】 - ↑ 《울진 나곡리 왕녀아기씨태실비(王女阿只氏胎室碑)》----황명만력사십칠년(1619년) 6월 23일 왕녀아기씨 태실
- ↑ 《현종실록》 9권, 현종 5년(1664년 청 강희(康熙) 3년) 11월 1일 )무자)
광해군 딸의 졸기
광해군의 딸이 졸하였다. 【광해는 곧15대국왕(主)이다.}}】상이 호조에 명하여 장례 물품을 넉넉히 주게 하였다.
외부 링크
편집제15대 조선 국왕 | ||
전 임 선조 |
1608년 3월 17일 ~ 1623년 음력 3월 | 후 임 인조 |
전임 인종 |
조선의 대리청정 1592년 ~ 1597년 |
후임 조선 광해군 |
전임 조선 광해군 |
조선의 대리청정 1606년 ~ 1608년 |
후임 봉림대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