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4세
John XIV of Constantinople요한 14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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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 |
교회 |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
재직중 | 1334년 2월 – 1347년 2월 2일 |
전임자 |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이사야스 |
후계자 | 이시도레 1세 |
개인내역 | |
태어난 | c. 1282년 |
죽은 | 1347년 12월 29일 |
존 14세, 칼레카스(그리스어: ίωάνηηηηηηηηη'''''''),),),),),),ααααααααααααα), (c. 1282년 ~ 1347년 12월 29일)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에큐메니컬 총대주교였다. 그는 그레고리 팔라마의 반헤시스트였고 적수였다. 그는 요한 6세 칸타쿠제노스에 대항하여 요한 V 팔라이올로고스 섭정의 일원으로 1341–1347년의 비잔틴 내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사생활
존 칼레카스는 1282년경에 트라이스의 아프로스에서 태어났다. 존은 평범한 환경에서 자란 후 결혼하여 아들 딸을 낳았다.
경력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요한은 요한 칸타쿠제노스의 후원을 받고, 안드로니코스 3세의 수석 장관, 후에 메가스 데메티코스의 후원을 받아 황실에 그를 소개하였다. 1334년 가부장적 유대교 신자의 저항에 맞서 존 칸타쿠제노스는 처음에는 테살로니카의 메트로폴리탄으로, 다음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로 존 칼레카스를 그의 당선으로 이끌었고, 거기서 이시아스의 뒤를 이었다.
1337년경, 칼라브리아 수도사 존 칼레카스의 총대주교 시절 초라 성 구세주 수도원 주교였던 바라암은 아토스 산을 방문하면서 헤시크즘의 관행을 알게 되었다. 서부학술신학 교육을 받은 Barlaam은 스캔들을 당했고, 그 관행과 그 옹호자인 Gregory Palamas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분쟁은 그레고리 팔라마의 지지자인 안드로니코스 3세 황제가 콘스탄티노플 제5차 평의회를 소집한 1341년까지 커졌다. 비록 그는 바르람을 지지했지만, 요한은 그의 비난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의 비난이 있은 후, 바르람은 콘스탄티노플을 영원히 떠났다. 그 후, Barlaam의 명분은 Gregory Akindynos에 의해 차지되었다. 1344년, 존 칸타쿠제노스가 소집한 교회에서, 총대주교 요한은 결석했고, 그레고리 아킨디노스도 비난을 받았다.
1345년 마침내 Barlaam 당에 헌신한 총대주교 요한은 교회에서 그레고리 팔라마스를 추방하고 1347년 존이 죽은 후까지 3년간 그를 감옥에 가두었던 시노드를 소집했다. 같은 교회에서 존은 그레고리의 제자였던 몬엠베시아의 이시도레 주교도 파문시켰다.
1341년 6월 안드로니코스 3세 황제가 사망한 후, 영아 공동황제 존 5세 팔라이올로고스의 섭정과 관련된 두 파벌이 황실에 나타났다.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의 호기심에 힘입어 양측은 1347년까지 지속된 비잔틴 내전을 벌였다. 일부 공작 후 그레고리 팔라마스의 지지자였던 존 칸타쿠제노스를 중심으로 한 파벌이 형성되어 마케도니아와 트라이스의 지방 거물들을 포함시켰다. 제국주의 권력을 장악한 다른 파벌은 총대주교 존 칼레카스와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가 이끌었고, 젊은 존 5세 팔라이올로고스의 섭정을 맡으려는 노력으로 안드로니코스의 미망인 사보이(Annna of Savoy)를 지지했다. 파벌을 형성하면서 안나는 총대주교 요한에게 섭정을 시키고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를 에파르코스(도시현)로 임명했다.
초기에는 섭정이 우위를 점했지만, 1345년경에는 오스만 제국 오르한 1세의 도움과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의 살해에 도움을 받은 존 칸타쿠제노스가 섭정을 심한 타격을 입혔다. 1346년 요한 6세 칸타쿠제노스는 아드리아노플에서 공동제국 황제로 즉위하고 1347년 2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였다. 그 후, 섭정 전쟁은 존 칸타쿠제노스가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원로 황제가 되어 요한 V 팔라이올로고스의 섭정이 되리라는 합의로 끝났다.
1347년 시노드
1347년 2월에 시노드가 열렸는데, 이 시노드는 존을 디도모티쵸로 추방하고 그레고리 아킨디노스를 추방했다. 1344년 시노드에 의해 파문된 이시도레 부치라스는 이제 총대주교가 되었다.[1]
콘스탄티노플에 승리한 요한 6세 칸타쿠제노스는 회유가 끝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여 반대파에게 그를 공동제국 황제로 책봉하도록 강요했다. 그의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는 존 14세의 증적을 확인하고 그에게 막 불리한 판결을 받은 시노달 단지를 승인하는 것이었다.[1]
헤시크즘 논쟁은 칼리스토스 1세의 총대주교 시절인 1351년 6번째 총대주교회에서 분쟁의 최종 해결이 이루어지기 전에 총대주교 이시도르의 수락을 거부한 Barlaam 지지자들에 의해 소집된 시노드를 통해 계속되었다.
기말년
1347년 후반에 퇴위한 존 칼레카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다가 그해 말 사망하였다.
원천
- Klaus-Peter Todt (1992). "Johannes XIV. Kalekas, Ökumen. Patriarch von Konstantinopel". In Bautz, Friedrich Wilhelm (ed.). Biographisch-Bibliographisches Kirchenlexikon (BBKL) (in German). Vol. 3. Herzberg: Bautz. cols. 426–428. ISBN 3-88309-035-2.
- 가톨릭 백과사전: 헤시차즘
- 테살로니카 대주교 그레고리 팔라마스 도색
참조
- ^ a b Jugie, Martin. "The Palamite Controversy". Retrieved 2010-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