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투그투 칸 쿠세야

Khutughtu Khan Kusala
쿠투그투 칸 쿠세야
원 명종
元明宗
몽골 제국의 13대 카간
(제국의 분열로 인해 공칭)
중국의 황제
Kusala.jpg
원나라의 황제
군림하다1329년 2월 27일 – 1329년 8월 30일
대관식1329년 2월 27일
전임자자야투 칸 투그 테무르
후계자자야투 칸 투그 테무르
태어난1300년 12월 22일
죽은1329년 9월 30일 (1329-09-30) (28세)
옹가차투, 내몽골, 원나라
배우자바부샤
카를루크스의 메일레이티
이름
몽골어: ᠬᠥᠯᠨᠨᠨ
Chinese: 和世㻋
쿠체라아/쿠살라(안)
시대 날짜
톈리 (天里; "천연력", 1329년)
섭정명
슌톈 리다오 루이웬 지우 다성 샤오( (天文文文文大成大);
쿠투그투 칸 (ᠬᠤᠤᠭᠤᠤ;;; ;都篤汗))
사후명
이셴징샤오( (ix獻景) 천황)
사원명
명종(明宗)
보르지긴
왕조위안
아버지쿨루그 칸

Khutughtu Khan (Chinese: 忽都篤汗; Mongolian: Хутагт хаан, Hutagt haan, Qutuγtu qaγan), born Kuśala (Chinese: 和世剌; Mongolian: Хүслэн Höslen), also known by the temple name Mingzong (Emperor Mingzong of Yuan, Chinese: 元明宗; December 22, 1300 – August 30, 1329), was a son of Khayishan who seized the throne of the Yuan dynasty of China in 1329, but died so뒤에[1] 중국 천황과는 별개로 제국이 분열되어 명목상만 하였지만 몽골 제국13대 칸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기유배

그는 카이샨(Külüg Khan 또는 황제 Wuzong)의 장남이자 몽골계 Ikhires 여성이었다. 카이산 정권은 동생 아유르바르와다와 그들의 어머니인 흐엉기라드 일족의 불안정한 균형에 따라 수립되었기 때문에, 하이야산은 후계 후 쿠알라에게 지위를 물려주는 조건으로 아유르바르와다를 황태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1311년 하이샨의 사후 아유르바르와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1320년 다기, 테무데르 등 흐엉기라드 파벌의 일원들은 아유르바르와다의 아들 시데발라를 쿠알라 대신 새 통치자로 설치하였는데, 그의 어머니는 흐엉기라드 일족이 아니라 이크히레스 씨족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시데발라의 왕위를 보장하기 위해 쿠살라는 추왕의 칭호를 받고 1316년 윈난으로 좌천되었다가,[2] 친카야샤 관리가 산시에서 반란이 실패한 후 조언한 대로 중앙아시아에스엔부카트라이 칸나테로 도망쳤다. 차가타이드 칸 에스엔 부하(Chagatayid Khan Essen Bukha)는 쿠잘라가 자신의 영역 근처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맞이하기 위해 왔다. 그 후, 쿠세루아는 차가타예드 왕자들의 지원을 받았다.[3] 중앙아시아로 망명하는 동안 그는 카루크의 테무더의 딸인 메일레이티와 결혼했다.[4]

짧은 가입과 갑작스러운 죽음

비록 경쟁파는 시디발라 칸(잉종황제)이 암살당했을 때 예순 테무르 칸(태종황제)에 의해 숙청되었지만, 그는 중앙아시아에 남아 있었다. 그는 알타이 산맥의 서쪽에 위치한 자신의 거점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1328년 예순 테무르 칸이 사망하자 상두라기바그와 다두의 투그 테무르 사이에 '두 수도 전쟁'으로 알려진 내전이 발발했다. 전자는 예순 테무르의 아들로 도라트 샤가 이끄는 전 예순 테무르 행정부를 지원받았으며, 후자는 킵차크 사령관 엘 테무르헤난 주지사 바얀이 이끄는 전 카예산파의 지지를 받은 쿠잘라의 동생이었다. 이것은 투그 테무르가 고비 사막 남쪽의 왕자와 귀족, 군벌의 지지를 대부분 확보했기 때문에 승리로 끝났다. 투그 테무르는 다두에게 오라버니를 불러들였다.

이와 동시에 쿠잘라는 차그하데이 지도자인 엘지기디와 두와 테무르의 지원을 받아 타르바가타이 지역(칸가이 산맥)에서 몽골로 진출했다. 또한 몽골의 왕자와 장군들의 지지를 얻었고, 압도적인 군사력을 배경으로 이미 왕위에 오른 투그 테무르를 압박했다. 쿠잘라는 1329년 2월 27일 카라코룸 북쪽에 정착했다.[1]

투그 테무르는 같은 해 4월 3일 퇴위했고, 한 달 뒤 엘 테무르는 다두의 환영 의사를 밝히며 몽골 쿠알라에게 황실 도장을 가져왔다. 쿠잘라는 5월 15일 투그 테무르를 명백한 후계자로 임명함으로써 이에 응했다. 쿠잘라는 자신의 충실한 추종자들을 비서국, 군무국, 중사부의 중요한 직책에 임명하기 시작했다.

쿠살라는 1800명을 데리고 다두로 떠났다. 8월 26일 옹구차드(옹가차투)에서 투그 테무르와 만나 투그 테무르가 중두 시를 건설했다.[5] 그는 투그 테무르와의 연회 후 불과 4일 만에 갑자기 죽었다.[6] 원시는 운 좋은 쿠잘라 칸이 폭력으로 죽었다고 말한다.[7] 쿠잘라는 쿠잘라를 추종하는 차가타이 자바테와 몽골의 왕자와 장교들에게 권력을 빼앗길 것을 우려한 엘 테무르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보인다.[8] 투그 테무르는 9월 8일 왕위에 복귀했다.

가족

쿠투크투 칸
바부샤 하툰

쿠투그투 칸에게는 유명한 카루크 족장 아르슬란의 후손인 메일레이티(Mailaiti)인 두 부인이 있었는데, 그는 나이만의 징기스칸바부샤에게 출품했다. 이들은 중국을 통치한 마지막 몽골 황제 토혼 테무르를 비롯해 두 명의 몽골 황제를 낳았다.

  • 부모:
    • 뮐뤼그, 우종 (武宗, 1281년 8월 4일 – 1311년 1월 27일)
    • 후궁 소공(寿童子)
  • 아내 및 자녀:
    • Mailaiti (迈来迪; 1290's – 1320)
      • 토혼 테무르, 후종(後宗, 1320년 5월 25일 ~ 1370년 5월 23일)은 첫째 아들이다.
    • Anchuhan (按出罕)
    • Yuelusha (月魯沙)
      • 창궈공주(長國公主)
    • Buyanhuludou (不顏忽鲁都)
    • Yesu (野蘇)
    • Tuohusi (脫忽思)
    • Babusha (八不沙; d. 1330)
      • 린친발, 닝종(寧宗, 1326년 5월 1일 ~ 1332년 12월 14일), 둘째 아들
    • 알 수 없는
      • 명희공주 전이(明熙公主, 明熙公主, 개인명 부닥시니(

참고 항목

참조

  • Ч.Далай – Монголын түүх 1260–1388
  • Д.Цэен-Ойдов – Чингис богдоос Лигдэн хутагт хүртэл монголын хаад
  1. ^ Jump up to: a b 허버트 프랑케, 데니스 트윗쳇, 존 킹 페어뱅크-중국의 케임브리지 역사: 외계 정권과 국경 국가, 907–1368, 페이지 545.
  2. ^ 허버트 프랑케, 데니스 트윗쳇, 존 킹 페어뱅크-중국의 케임브리지 역사: 외계 정권과 국경 국가, 907–1368, 페이지 542.
  3. ^ 위안시 33. 페이지 694.
  4. ^ 안드레아스 래드브루흐-플로우 세포분열 및 세포분열 1290페이지.
  5. ^ 시아오 쿵친-룬원 태황위청( p cheng p, 페이지 33).
  6. ^ 위안시, 31. 페이지 700.
  7. ^ 위안시, 31. 페이지 701.
  8. ^ 후지시마 다테키-겐노 민소노 쇼가이, 22페이지.
쿠투그투 칸 쿠세야
출생: 1300년 사망: 1329년
섭정 직함
선행자
몽골 제국대칸
(제국의 분열로 인해 공칭)

1329
성공자
원나라의 황제
1329
중국의 황제
1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