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전쟁 범죄
German war crimes독일 제국과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 휘하)의 정부는 상당수의 전쟁범죄를 명령하고 조직하고 묵인했는데, 처음에는 헤레로와 나마쿠아 학살, 그 다음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과 로마니가 조직적으로 살해된 홀로코스트다. 수백만 명의 민간인들과 전쟁 포로들 또한 독일의 학대와 학대, 그리고 고의적인 기아 정책의 결과로 죽었다. 증거의 상당 부분은 손데라크티온 1005와 같은 가해자들에 의해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시도로 고의적으로 파기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
20세기 최초의 대량학살로 여겨지는 헤레로와 나마콰 학살은 1904년부터 1907년 사이에 독일 제국이 아프리카를 위한 스크램블 기간 동안 독일 남서부 아프리카(현대 나미비아)에서 자행했다.[1][2][3][4][5] 1904년 1월 12일 사무엘 마하레로가 이끄는 헤레로 민족은 독일의 식민주의에 반기를 들었다. 8월에는 독일 제국군의 로타르 폰 트로타 장군이 워터버그 전투에서 헤레로를 격파하여 오마헤케 사막으로 몰아 넣었는데, 그 곳에서 대부분은 갈증으로 죽었다. 10월에는 나마족도 독일인들에게 반란을 일으켜 비슷한 운명을 겪었을 뿐이다.
모두 2만 4천 명에서 10만 명에 이르는 헤레로와 1만 명의 나마가 죽었다.[6][7][8][9][10] 이번 대량학살은 폭력사태에서 탈출한 헤레로가 나미브 사막에서 돌아오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기아와 갈증에 의한 광범위한 죽음을 특징으로 삼았다. 독일 식민지군이 사막의 우물을 조직적으로 독살했다는 주장도 있다.[11][12]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전쟁 범죄에 관한 문서들은 프랑스를 점령한 후 나치 독일에 의해 압류되어 파괴되었고, 그들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물들도 있었다.[13]
화학무기
독가스는 제국 독일이 처음 무기로 도입하고, 이후 모든 주요 교전국들이 '독이나 독살된 무기'의 사용을 명시적으로 금지한 1899년 헤이그 선언과 1907년 헤이그 토지전협약을 위반해 사용하게 된다.[14][15]
벨기에
1914년 8월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의 일환으로 명시적 경고 없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공해 점령했으며, 이는 독일 총리가 '종이 스크랩'으로 치부한 1839년의 조약과 1907년 헤이그 적대행위개방에 관한 협약을 위반했다.[16] 전쟁 후 처음 두 달 안에 독일 점령군들은 벨기에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여 수천 명의 민간인을 살해하고 주로 벨기에 게릴라전에 대한 보복으로 벨기에의 명문대학을 수용한 르우벤을 비롯한 수많은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웠다(프랑-타이어 참조). 이번 조치는 1907년 헤이그 토지전협약을 위반해 민간인 집단 처벌과 점령지 내 민간인 재산 약탈 및 파괴를 금지한 것이다.[17]
영국 해안 도시 폭격
1914년 12월 16일에 일어난 스카버러, 하틀풀, 휘트비 등에 대한 습격은 영국 해군의 스카버러, 하틀풀, 웨스트하틀풀, 휘트비 시에 대한 제국 독일 해군의 공격이었다. 이 공격으로 137명의 사망자와 59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번 공습은 하틀풀만이 해안 전지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기 때문에,[18] 방어되지 않은 도시에 대한 해상 폭격을 경고 없이 금지한 1907년 헤이그 협약 9조를 위반한 것이다.[19] 독일은 1907년 헤이그 협약의 서명자였다.[20] 또 다른 공격은 1916년 4월 26일 야머스와 로스토프트의 해안 도시들을 공격했지만 둘 다 중요한 해군 기지였으며 해안 포대로 방어되었다.[citation needed]
무제한 잠수함전
무제한 잠수함 전쟁은 1915년 영국의 독일 해상 봉쇄에 대응하여 시작되었다. 1907년 헤이그 협약에 따라 상거래 침입자들에게 그들의 목표물을 경고하고 선원들이 구명정에 탑승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하도록 요구하는 것과 같은 상법은 무시되고 상업 선박은 국적, 화물 또는 목적지에 관계없이 침몰되었다. 1915년 5월 7일 RMS Lusitania가 침몰한 이후 미국을 포함한 여러 중립국가의 국민들의 거센 항의가 있은 후, 그 관행이 철회되었다. 그러나 독일은 1917년 2월 1일 관행을 재개하고 국적 불문하고 모든 상선을 예고 없이 침몰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미국 대중을 격분시켰고, 이틀 뒤 독일과의 외교관계를 끊게 했으며, 짐머만 텔레그램과 함께 두 달 뒤 연합국 편에서 미국의 전쟁 진출을 이끌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연대기적으로 제1차 독일 제2차 세계대전의 범죄, 또 그 전쟁의 제1막은 군사적인 가치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마을인 위엘루제의 폭격이었다.[21][22]
더욱 중요한 것은 유태인 대학살, 장애인 행동 T4, 집시들의 뽀라지모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저지른 가장 주목할 만한 전쟁범죄다.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저질러진 모든 범죄와 유사한 집단 만행이 전쟁 범죄는 아니었다. 텔퍼드 테일러(미국 검찰, 뉘른베르크 재판소 독일 고등 지휘부 사건)는 1982년 미국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소 전 12개 재판의 최고 고문변호사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적국인에 대한 전시행위에 관한 한, [1948] 대량학살 협약은 "가족의 명예와 권리, 개인의 생명과 민영화"를 존중하기 위해 점령권을 필요로 하는 국제적으로 인정된 토지전법에 의해 이미 다루어져 있던 것(그리고 1899년 헤이그 협약 이후)에 사실상 아무것도 추가하지 않았다.적국인의 종교적 신념과 자유는 물론 e 재산. 그러나 전쟁법칙은 전쟁이나 평화 중 어느 것이든 자국 국민에 대한 정부의 행동(나치 독일의 독일 유대인 박해 등)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그리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재판소는 국제법의 범위 내에서 그러한 "국내적인" 만행을 "인륜에 반하는 범죄"로 끌어들이기 위한 검찰의 몇 가지 노력을 기각했다.
— Telford Taylor[23]
- 소련의 포로들에 대한 독일의 학대 – 570만 명의 생포자 중 적어도 330만 명의 소련 전쟁포로들이 독일 보호소에서 죽었다. 이 수치는 57%의 전쟁포로 사망률을 나타낸다.
- 르 파라디스 대학살, 1940년 5월, 영국 왕립 노퍽 연대의 군인들이 SS에 붙잡혀 그 후 살해되었다. 프리츠 크누클린은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 웜허드 대학살, 1940년 5월,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SS에 포로로 잡혔고, 그 후 살해되었다. 그 범죄의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1942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후 리디체 학살, 체코 마을이 완전히 파괴되고 주민들이 살해되었다.
- 아르덴 수도원 학살,[24] 1944년 6월 SS에 의해 붙잡혀 12 SS 기갑사단 히틀러쥬겐드에 의해 살해된 캐나다 군인들. SS 장군 커트 마이어(판저마이어) 1946년 총살 선고, 감형, 1954년 석방
- 1944년 12월 말메디 학살, 캄프그루페 피페르가 포로로 잡은 미국 포로들이 벨기에 말메디 외곽에서 살해되었다.
- 와르스 대학살. 1944년 12월 17일./SS-PzAA1 LSSAH는 벨기에 와르스 햄릿에서 333 포병대대의 흑인 병사 11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포로가 총에 맞아 손가락이 잘리고 다리가 부러졌으며, 동지의 상처에 붕대를 감으려다 최소 1명이 총에 맞았다.
- 1945년 4월, 나치 강제 수용소 포로들이 헛간으로 강제 수용되었을 때 가르데레겐(전쟁 범죄)은 그 후 불이 붙어 내부가 모두 죽었다.
- 오라두르-수르-글레인 학살
- 칼라브라이타 대학살
- 상선 운송에 대한 무제한 잠수함전.
- 노브고로드의 주요 중세 교회, 모스크바 지역의 수도원(예: 뉴 예루살렘 수도원) 및 성 주변의 황궁들을 의도적으로 파괴한 것이다. 페테르부르크(그 중 상당수는 전후 당국이 폐허나 단순 철거에 방치한 것이다.
- 점령지에서의 슬라브인구의 몰살운동. 수천 개의 마을이 전체 인구와 함께 불탔다(예: 벨라루스의 카틴 대학살). 벨로루시 주민의 4분의 1이 독일 점령지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 히틀러가 1942년 10월 특공대 작전 중 마주친 연합군 전투원들을 적절히 제복을 입었거나, 무장하지 않았거나, 투항할 의사가 있더라도 재판 없이 즉시 처형하도록 명령한 비밀명령인 특공대령이다.
- 코미사르 훈장, 1941년 소련 침공 전 히틀러가 베흐마흐트 부대에 보낸 명령으로, 코미사르를 생포한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이다.
- 죄수 실종에 대한 1941년 나흐트·네벨 훈령
전범
- 전쟁범죄로 기소된 축군 인사 목록
- 나치 의사 목록
- 아돌프 아이히만
- 하인리히 그로스
- 한스 하인제
- 루돌프 호이스
- 칼 린나스
- 요제프 멘겔레
- 오트마르 프리허르 폰 베르슈에르
- 알프레드 트제빈스키
장소별 제2차 세계대전의 학살 및 전쟁범죄
오스트리아
벨라루스
- 1941
- 27 10월 27일, 슬러츠크, 슬러츠크 어페어(여성과 어린이 포함 4,000명)
- 9월 28일 – 10월 17일, 플레슈체니체-비스콜린-삭(샤카크)-보브르-우즈다(화이트 루테니아) 학살(1126명)
- 1942
- 3월 26일 – 4월 6일 밤베르크 작전(Hwusk, Bobrujsk, 어린이 포함 4,396명)
- 1942년 4월 29일과 8월 10일, 디아트와우(디야틀라바) 디아트와우(디야틀라바);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3,000~5,000명
- 9 – 12년 5월, Kliczow-Bobrujsk 학살 (아동 포함 520명)
- 6월부터 스워우드카-보브루즈크 대학살(아동 포함 1000명)
- 15년 6월 보르키 (파우아 비아워스토키) 학살 (아이 포함 1,741명)
- 6월 21일 즈비신 학살 (아동 포함 1,076명)
- 6월 25일 팀코비치 학살 (아동 포함 900명)
- 6월 26일 스터덴카 대학살 (아동 포함 836명)
- 7월 18일 젤스크 대학살 (아동 포함 1000명)
- 7월 15일 – 8월 7일 Adler 작전 (Bobrujsk, Mohylew, Berezyna; 어린이를 포함한 1,381명)
- 14 – 20 8월, 그리프 작전 (Orsza, Witebsk; 어린이를 포함한 796명)
- 8월 22일 – 9월 21일, 섬피버 작전(화이트 루테니아, 어린이 포함 10,063명)
- 8월, 베레온 대학살
- 9월 22일~9월 26일, 마워리타 학살, 어린이 포함 4,038명)
- 9월 23일 – 10월 3일, 작전 블리츠(포워크, 위트브스크, 어린이 포함 567명)
- 11 – 23년 10월, 칼스바드 작전 (Orsza, Witebsk; 어린이를 포함한 1,051명)
- 23 – 29, Nürnberg 작전 (Dubrowka, 어린이 포함 2,974명)
- 12월, 미르나야 대학살, 미르나야(Mirnaya мрар), 벨라루스(be);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147명
- 10 – 21년 12월 함부르크 작전(니멘 강-슈차라 강, 어린이 포함 6,172명)
- 22 – 29년 12월, 알토나 작전 (스워님, 어린이 포함 1,032명)
- 1943
- 6 – 14년 1월 프란츠 작전(그로스잔카, 어린이 포함 2,025명)
- 1월 10일 – 11일, 피터 작전 (Kliczow, Kolbcza; 어린이를 포함한 1,400명)
- 1월 18일 – 23일 스워크-미슈크-체르비에 학살 (아동 포함 825명)
- 1월 28일 – 2월 15일, 슈네하세 작전; 포워크, 로소니, 크라스노폴; 어린이를 포함한 2,283명; 54; 37명
- 1월 28일까지 Erntefest 1호 작전 (Czerwień, Osipowicze, 어린이 포함 1,228명)
- 야누아르 작전(브라이어스크와 드미트리예프-로고프스키 사이)
- 2월 1일까지 월드윈터 작전(시로티노-트루디, 어린이 포함 1627명)
- 8~26년 2월 호릉작전(레닌, 한스위체, 어린이 포함 1만2897명)
- 2월 9일까지 Erntefest II 작전(스워크, 코필, 어린이 포함 2,325명)
- 2월 15일 – 3월 말 윈터자우버 작전(오위자, 라트비아 국경, 어린이 포함 3,904명)
- 2월 22일 – 3월 8일 쿠겔블리츠 작전(포워크, 오우위자, 드라이사, 로소니, 어린이 포함 3,780명)
- 3월 19일까지 닉세 작전(Ptycz, Mikaszewicze, Pisksk, 어린이 포함 400명)
- 3월 21일까지 뢴 작전(피에스크, 어린이 포함 543명)
- 3월 21일 – 4월 2일 도너킬 작전(포워크, 위트브스크, 어린이 포함 542명)
- 3월 22일, 카틴 대학살, 여성과 어린이 등 149명
- 1 – 9, Draufgenger II 작전 (Rudnja and Mony forest; 어린이를 포함한 680명)
- 17 – 21년 5월, 메이게위터 작전(위트브스크, 수라화, 고로독, 어린이 포함 2,441명)
- 5월 20일 – 6월 23일, Cottbus 운영(Lepel, Begomel, Uszacz, 어린이 포함 11,796명)
- 5월 27일 – 6월 10일, 와이첼 작전 (Homel의 남서쪽, Dniepr-Prypech 삼각지대; 어린이를 포함한 4,018명)
- 13 – 16년 6월, 지에텐 작전 (Rzeczyca; 어린이를 포함한 160명)
- 6월 25일부터 7월 27일까지 세이들리츠 작전 (Owrcz-Mozyrz; 어린이 포함 5,106명)
- 7월 30일 모지르츠 학살 (아동 포함 501명)
- 7월 14일까지 귄터 작전(Woloszyn, Lagoisk, 어린이 포함 3,993명)
- 7월 13일 – 8월 11일 헤르만 작전(아이위, 노오그로데크, 월로신, 스토우프체, 어린이를 포함한 4,280명)
- 9월 24일 – 10월 10일 프리츠 작전 (그우보키; 어린이를 포함한 509명)
- 10월 9일 – 10월 22일 Stary Bychow 대학살 (아이 포함 1,769명)
- 11월 1일 – 11월 18일, 하인리히 작전(로소니, 포워크, 이드리카, 어린이 포함 5,452명)
- 12월, 스파스코제 대학살 (아동 포함 628명)
- 12월, 비아위 대학살 (아동 포함 1,453명)
- 12월 20일 – 1944년 1월 1일, 오토 작전 (오우위자; 어린이를 포함한 1,920명)
- 1944
- 1월 14일, 오와 대학살 (아동 포함 1,758명)
- 1월 22일 바이키 학살 (아동 포함 987명)
- 3 – 15년 2월 울프자그드 작전(Hwusk, Bobrujsk; 어린이를 포함한 467명)
- 5 – 6년 2월, 바리스즈 (Buczaczz 인근) 학살 (어린이를 포함한 126명; pl:Zbrodnie w Baryszu 참조)
- 2월 19일까지 섬프한 작전(Hwusk, Bobrujsk, 어린이 포함 538명)
- 3월부터 베레지나-비엘니츠 대학살 (아동 포함 686명)
- 7 – 17 4월, 아우어핸 작전 (보브루즈크; 어린이 포함 1,000명)
- 4월 17일 – 5월 12일 프뤼흘링스페스트 작전(포워크, 우사츠, 어린이 포함 7,011명)
- 5월 25일 – 6월 17일, 코르모란 작전; (윌레즈카, 보리소우, 민스크, 어린이 포함 7,697명)
- 6월 2일 – 13일, Pfingsrose 작전 (Talka; 어린이를 포함한 499명)
- 6월, Pfingstausnlug 작전 (시엔노, 어린이를 포함한 653명)
- 6월, 윈드위르벨 작전(치드라, 어린이 포함 560명)
벨기에
- 1940
- 5월 25일 빈크트 대학살 (Vinkt, East Flanders, 어린이 포함 86-140명)
- 1944
- 8월 18일 쿠르셀레스 대학살 (하이노우트 주 쿠르셀레스; 어린이를 포함한 20명)
- 12월, 말메디는 학살 (말메디와 주변 지역; 적어도 373명의 미국 전쟁포로)
- 12월 17일, 바우그네즈 교차로 학살 (Baugnez (말메디 인근, 리에 주, 81명의 미국 전쟁포로)
- 12월 17일, 와르스 대학살 (리에주 웨레스, 11명의 미국 전쟁포로)
- 12월 24일, 반데 대학살 (룩셈부르크 주 반데; 20~31세 사이의 34명)
크로아티아
- 1943
- 1944
체코슬로바키아
- 11월 17일 대학과 대학 대항 공격
- 제1차 계엄령(프라하의 제1차 헤이드리치다)
- 제1차 계엄령(브르노의 제1차 헤이드리치다)
- 리디스 대학살
- 레하키 대학살
- 테레시엔슈타트 강제수용소 청산
- 브란데스나드 오를리시의 "죽음의 교통"
- 스토드의 "죽음의 교통" (체코 공화국)
- 자블룬코프 학살
- 니자니의 "죽음의 교통"
- 미쿨로프 진흙 구덩이에서 살인
- 게스테하우스의 살인 사건
- 플로슈티나 대학살
- 자코프 대학살
- 메들란키 궁정
- 프롤로프 학살
- 살라시 학살
- 수흐트 대학살
- 레토비체 학살
- 테레시엔슈타트의 마지막 처형
- 라체에서의 실행
- 포트 XIII에서 실행
- 올브라모비체의 "죽음의 교통"
- 포드보아니카슈티체 죽음의 행진
- 자보히치코 대학살
- 브란더스 비극
- 볼라리 디트 행진
- 벨케 메지치 대학살
- 레스코비체 대학살
- 우섭스카 거리 학살
- 파리 대학살
- 레드니체 학살
- 콜린 대학살
- 테슈 대학살
- 벨케 포포비체 학살
- 라호비체 학살
- 마사리코보 나드라지 학살
- 트르호바 카메니체 학살
- 말린 비극
- 주로 정치범들을 처형하는 장소인 코빌리스 사격장
- 지보티체 학살
- 프라하 봉기 중 전쟁 범죄에는 민간인을 인간 방패, 즉결 처형, 학살 등이 포함되었다.
- 트르호바 카메니체 학살
에스토니아
- 에스토니아의 홀로코스트
- 칼 린나스의 아동 살해
- 1941
- 1942
- 3월 27일 플라이너 아동 살해 (에스토니아의 홀로코스트, 3명의 아동)
프랑스.
- 1945년 8월 25일 순교자 27명 사건
- 아스크 대학살 1944년 4월
- 와펜-SS에 의한 영국군과 캐나다군의 아르덴 수도원 학살
- 드랜시 수용소 살인 사건
- 도르트 학살
- 던레플레이스 대학살
- 제1차 생줄리엔 대학살
- 그라인 대학살
- 이지외 고아원은 1944년 4월 6일 아우슈비츠로 추방되었다.
- 카를 호츠 보복
- 르 파라디스 대학살
- 보이스 데레인 대학살
- 마일레 학살
- 펜게그렉 대학살
- 사울렉스 학살 사건
- 생제니스 라발 학살
- 제2차 생줄리엔 학살
- 게리 우물의 비극
- 툴레 학살, 1944년 6월 9일
- 오라두르-수르-글레인 학살 (남녀, 어린이 642명) 1944년 6월 10일
- 웜허드 대학살
독일.
- 액션 T4
- 하다마르 클리닉(NS-Tötungsstalt Hadamar)의 아동 살해 사건 대부분이 Irmgard Huber에 의한 사건
- 한스 하인제에 의한 아동 살해
- 오트마르 프리허르 폰 베르슈에르#나치 인간 실험에 관여
- 1945
- 4월 8일 - 셀레 대학살
- 4월 13일 - 가르데레건 대학살
- 4월 20일 - 알프레드 트제빈스키에 의한 아동 20명 살해
그리스
- 클라이소우라 대학살 (마세도니아, 270명의 여성과 아이들)
- 콘도마리 학살(크레테, 60명, 주로 장로)
- 피케르미 대학살 (피케르미, 54세, 여성과 어린이 포함)
- 피르고이(구 카트라니차) 학살 (피르고이, 346명, 여성과 어린이 포함)
- 칸다노스의 라징(크레테, 180명, 여성과 어린이 포함)
- 비아노스 홀로코스트(크레테, 500명 이상, 여성과 어린이 포함)
- 디스토모 학살(중앙 그리스, 여성과 어린이 포함 218명)
- 드레이키아 학살 (테살리, 118명)
- 케드로스 대학살 (크레테, 164명, 여성과 어린이 포함)
- 곤메노 대학살 (에피루스, 여성과 어린이 포함 317명)
- 칼라브라이타 학살(펠로폰네세, 여성과 어린이 포함 1200명 이상)
- 칼리 시기아 (크레테, 13세, 여자)
- 린지아데스 대학살(에피루스), 92세, 대부분 유아, 아동, 여성, 노인.
- 아퀴사단의 학살(케팔로니아, 5,000명,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부대)
- 메소부노 학살(마케도니아, 여성과 어린이 포함 268명)
- 파라미시아 처형(에피루스, 201명, 여성과 어린이 포함)
- 초르티아티스 대학살 (마케도니아, 여성과 어린이 포함 146명)
- 카이사리아리 사형 집행 (아틴스, 200명 이상, 모든 민간인)
- 무사오티차 학살 (에피루스, 여성과 어린이 포함 153명)
- 말라시로스 처형(말레이시로스, 61세, 여성과 어린이 포함)
- 코키니아 사형 집행 (아틴스, 300명 이상, 모든 민간인, 보안대대의 지원)
- 칼리크라티스 사형 집행(크레테, 30세, 여성과 어린이 포함)
- 알리키아노스 사형 집행(크레테, 118명, 모든 민간인)
- 아노게이아의 라징(크레테, 미상, 여성과 어린이 포함)
- 스쿠르불라 (크레테, 적어도 36명, 모든 민간인)
또 순교 도시들의 헬레닉 네트워크에서는 90개 이상의 마을과 마을이 기록되어 있다.[30] 독일인, 이탈리아인, 불가리아인 세 쌍의 점령 기간 동안 약 80만 명의 사람들이 그리스에서 목숨을 잃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사상자 참조)
이탈리아
- 카스티글리오네 학살, 1943년 8월 12-14일, 카스티글리오네 디 시칠리아, 제1 폴스치름-판저 사단 헤르만 괴링이 민간인 16명을 학살하고 20명을 다치게 했다.
- 보브스 학살, 1943년 9월 8일 보브스, 독일 제1 SS 기갑사단 라이프스탠다르트 SS 아돌프 히틀러 점령군에 의해 23명의 시민(추가 22명 부상)을 대량 학살한 사건
- 1943년 9~10월, 마조레 호수, 제1 SS 기갑사단에 의한 이탈리아계 유태인 56명 살해 민간인들에 대한 어떠한 폭력도 수행하지 말라는 독일의 엄격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 카이아조 학살, 1943년 10월 13일 카이아조, 독일 29대 판저그레나디에 연대 점령군에 의한 민간인 22명 집단 살해. 리처드 하인츠 볼프강 레니크 엠덴
- 아르데아틴 학살 (로미, 라치오, 335명의 죄수 처형)
- 과르디살로 학살 (투스카니, 과르디살로; 1944년 6월 29일 민간인 46명 사망)[31]
- 피아자 타소 학살, 1944년 7월 17일 피렌체, 파시스트와 독일군에 의한 학살로 사망한 이탈리아 민간인 5명
- 1944년 8월 12일, 산탄나 디 스타제마 학살 (투스카니 주, 산탄나 디 스타제마, 어린이 포함 560명)
- 산 테렌조 몬티 학살 (투스카니 피비자노, 1944년 8월 21일 민간인 110명, 정치범 52명 살해)[32]
- 파둘레 디 푸세키오 학살 (푸세키오, 투스카니, 1944년 8월 23일 민간인 176명이 살해됨)[31]
- 빈카 대학살 (Fivizano, Tuscany; 1944년 8월 24일에 처형된 160[32]~178명의[33] 민간인)
- Certosa di Farneta 학살 (Lucca, Tuscany, 1944년 9월 2일에서 10일 사이에 민간인 60명이 살해됨)[31]
- 1944년 9월 29일 – 10월 5일, 마르자보토 학살 (Marzabotto, Emilia-Romagna, 770~1830명의 민간인 사망)
- 1944년 6월 29일, 치비텔라-코르니아-산 판크라치오 학살 (아브루초; 어린이를 포함한 203명)
- 쿠네오 학살(쿠네오, 피에몬트, 189명의 민간인과 빨치산들이 두 번의 개별 학살로 살해됨)[34]
- 카브릴리아-카스텔누오보데이 삽비오니 학살 (투스카니, 1944년 7월 4일 민간인 173명 사망)[31]
- Fosse del Frigido 학살 (Massa, Tuscany; 1944년 9월 10일 146-149명의 죄수 살해)[33]
- 피에트란시에리 학살 (로카라소, 아브루초, 1943년 11월 21일 민간인 128명 살해)[35]
- 스타아 학살 (Stia, Tuscany; 122명의 민간인이 1944년 4월 12일에서 15일 사이에 살해됨)[32]
- 발라 학살 (피비자노, 투스카니, 1944년 8월 19일 민간인 103명 사망)[33]
- 세라 디 론치도소 학살 (Gaggio Montano, Emilia-Romagna, 1944년 9월 28~29일 민간인 100명 이상 살해)[31]
- 베르게레토 학살 (Verghereto, Emilia-Romagna, 1944년 7월 22일부터 25일 사이에 96명의 민간인이 살해됨)[31]
- 몬키오, 스사노, 코스트리냐노 학살 (팔라가노, 에밀리아-로마냐, 1944년 3월 18일 살해된 79[32]~136명의 민간인)
- 레오네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