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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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론(Gelon)은 겔로(그리스어: γέλωωωω 겔론, gen. 데이노메네스의 아들 γέωω; 기원전 478년 사망은 시칠리아 도시 겔라와 시라큐스의 그리스 폭군이었으며, 데이노메니드 통치자의 첫 번째였다.[1][2]
초년기
겔론은 데이노메네스의 아들이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겔론의 조상은 에게 해의 텔로스 섬에서 왔고 시칠리아 남부 겔라 시의 창시자였다.[3] 그의 후대 조상 중 한 명인 티레인은 지구 여신들의 신성한 의식을 통해 내분 끝에 그의 백성을 화해시켰다고 한다; 헤로도토스는 겔론을 포함한 테레드의 후손들이 모두 이 사이비 종교의 사제라고 분개한다.[3]
겔론의 세 형제는 히에론, 트라시불루스, 폴리잘로스였다.[4] 데이노메네스는 자녀들의 운명에 관한 신탁을 상담했고, 겔론, 히에론, 트라시불루스는 모두 폭군이 될 운명이라는 말을 들었다.[citation needed]
겔론은 시칠리아의 여러 폭군 왕들 사이의 수많은 분쟁에서 싸웠고 가공할 군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겔라의 폭군인 삼촌 히포크라테스의 기병대장으로 승진한 그의 활약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포지션에서 그는 나중에 자신이 정복할 도시인 시라큐스를 상대로 한 전투를 포함한 여러 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5]
권좌에 오르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가 하이블라에서 시칠리아 원주민 시켈 부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나서야 겔론의 권력 상승이 시작되었다. 히포크라테스가 죽자 그의 아들들이 왕좌를 지켰지만, 평민들은 이 가문의 통치에 싫증을 느끼고 반란을 일으켰다. 겔론은 히포크라테스의 아들들이 권력을 잡도록 도와준다는 핑계로 반란을 진압했다. 대신 기원전 491년 군대의 도움으로 스스로 정권을 잡았다. 현재 폭군으로 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영토에는 겔라, 동쪽의 낙소스, 북동쪽의 잔클레, 남쪽의 카마리나가 포함되어 있었다.
시러큐스의 폭군
겔론은 이후 5년 동안 겔라와 시칠리아 동부의 다른 영토를 평화적으로 통치했다. 기원전 485년, 평민에 의해 도시에서 쫓겨나온 가모리라고 불리는 시라큐스의 귀족들이 그의 원조를 구하러 겔론에게 왔다. 팽창의 기회를 엿본 겔론은 이제 자신의 거대한 군대를 동원하여 거의 저항도 하지 않고 시라큐스 시를 점령하여 추방당한 가모리를 다시 설치했다.
겔론은 이제 시라큐스의 새로운 폭군으로 통치하고 동생 히에로를 남겨 겔라를 다스리게 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는 겔라 시민 절반에게 시라큐스로 이주하도록 강요했다. 마찬가지로 카마리나에서 귀족들을 모두 제거했다.
그는 인근 에우보에아와 메가라 하이블레아 (기원전 483년)를 정복하면서 각 도시에서 귀족들을 강제적으로 제거하고 나머지 인구를 노예로 만들면서 이 전략을 계속하였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는 귀족으로 자랐고 끊임없이 귀족의 면전에서 지냈기 때문에, 겔론은 하층민들을 돌보지 않았고, "집 한 채를 같이 쓰는 것이 불쾌한 서민들을 발견했다"고 한다.
겔론의 지배하에 시라큐스는 곧 번영하게 되었다. 겔론은 시라큐스의 웅장한 건축 프로그램과 함께 강력한 용병군 창설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의 군대를 위한 신병들은 대부분 토착 시켈 부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몇몇은 그리스 본토에서 영입되었는데, 과거 어느 시점에 겔론과 싸웠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남성들이며, 이들의 총수는 약 1만 명 정도라고 한다. 이 모든 남성들은 시러큐스의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겔론은 테론의 딸 드마레타와 결혼한 후, 겔라의 서쪽 도시인 아카가스의 폭군 테론에서 강력한 동맹군을 발견했다. 기원전 481년 아테네의 대표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와 그의 페르시아 군대에 대항한 다가오는 전쟁에 대한 그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그에게 왔다. 겔론은 그리스 해군이나 육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면 2만8000명의 병력과 200척의 배를 공급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두 가지 직책을 모두 거부당했고, 따라서 그리스인들에게 어떠한 물자나 남자도 공급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페르시아 왕이 그리스 동맹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를 대비해 크세르크세스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기까지 했다.
아테네 인들에게 제공되는 겔론의 병력 중에는 궁수, 슬링거 등 기병과 경군이 상당 부분 있었는데, 이는 군사과학이 아테네나 스파르타보다 겔론 밑에서 더 높은 수준을 달성했음을 시사한다.[6]
히메라 전투
그가 그리스인들을 지지하지 않으려는 것은 시칠리아 서쪽 해안에 있는 카르타고인들이 제기하는 위협과 관련이 있을 수 있었다. 아카가스의 테론이 히메라에서 폭군 테릴루스를 무찌를 때 강력한 카르타기니아인으로부터 시칠리아 전체의 독립을 위태롭게 했다. 히메라를 탈환하는 데 도움을 줄 강력한 동맹군을 찾아 테릴루스는 카르타고로 가서 도움을 청했다. 카르타고인들은 그의 탄원에 기꺼이 응했다. 카르타고인들은 시칠리아에서 그들의 영향력과 영토를 증가시키고자 열심이었고 그 기회는 다가오는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때문에 완벽한 시기에 왔다.
일부 학자들은 크세르크세스와 카르타고인들이 서로 접촉하면서 그리스 서부 및 동부 전선과 그 식민지를 동시에 공격하도록 조율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기원전 480년 30만 명의 카르타고 군대가 시칠리아 북쪽 해안의 파노르무스에 상륙하여 그들의 장군 하밀카에 이끌려 히메라를 향해 동쪽으로 진격했다. 겔론은 동맹인 테론이 처한 위험을 듣고 5만 명의 병력과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히메라로 갔다.
겔론의 부하들은 인근 도시 셀리누스에서 동맹군 행세를 하며 카르타기니아 진영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일단 안에서 그들은 하밀카의 배에 불을 지르면서 진영이 내려다보이는 산에 주둔하고 있는 겔론의 나머지 부대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이어진 전투는 겔론과 테론에게 결정적인 승리였으며, 카르타고인 사상자는 하밀카를 포함해 15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카르타고 진영에서 거둬들인 부와 카르타고와의 평화조약에서 비롯된 은 2천 달란트는 겔론이 그의 부대와 동맹국들 사이에 분산시켰고, 시라큐스에 새 신전을 짓기 위해 많은 액수가 지정되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겔론은 그의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시라큐스 주민들과 회의를 조직했고, 하밀카르와의 전쟁 중 그의 행동과 그가 망토를 분산시킨 방식을 그들에게 설명했다. 그는 그들에게 만약 그의 행동에서 뭔가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그들은 자유롭게 그를 죽이고 시라큐스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라큐스 사람들은 겔론을 그들의 폭군으로 유지하기로 결정했고, 그는 이후 2년 동안 평화롭게 군림했다.
죽음과 계승
겔론은 기원전 478년 시라큐스를 7년간 통치한 후 사망했다. 그의 왕국에 대한 통제는 그가 죽을 때까지 앞으로 10년 동안 통치했던 그의 형 히에론에게 넘어갔고, 그 때 왕관은 누구에게 넘겨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시라쿠산 국가의 해체로 이어졌다.
시칠리아와 그리스 역사에 대한 공헌 분석
겔론의 그리스어 첫 번째 주요 공헌,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역사는 시라쿠스의 수도로서 시라쿠스의 토대가 되었고, 그는 "서양에서 가장 위대한 그리스 도시"로 변모했다" 도시의 위치 자체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되었다. 이 도시는 BC 6세기에 건설된 반도에 의해 본토와 연결된 섬에 위치해 있었다. 그 도시는 그리스 본토를 향해 동쪽으로 향했고 그 도시만의 항구를 가지고 있었다.
겔론은 본토 아흐라디나 요새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담을 쌓아 시라큐스를 사실상 난공불락으로 만들었다. 또한 그는 시칠리아에서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전술인 정복된 도시에서 부유한 시민들을 불러들임으로써 도시의 번영을 크게 증대시켰다. 그는 도시의 문화를 향상시키는 극장을 지었고, 히메라에서의 승리에 이어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화려한 신전을 지었다. 이러한 모든 개선은 시라큐스의 역사에 여러 해 동안 영향을 미쳤다. 이 도시는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 모두에게 중요한 전초기지였으며, 오늘날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에 있어 역사적 중요성이 큰 곳이다.
겔론의 또 다른 큰 공헌은 히메라에서의 카르타고인들에 대한 승리였다. 이번 전투는 개최 시기와 장소 때문에 의미가 컸다. 하밀카가 겔론과 테론의 거대한 시칠리아군을 간신히 물리쳤더라면 그렇게 소원했다면 시칠리아 섬 전체를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본토에 있는 그리스 주들은 페르시아와의 전쟁 때문에 군대를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많은 역사가들이 믿고 있듯이 페르시아와 카르타고 군대가 서로 접촉하고 있었다면, 겔론에 대한 히메라에서의 패배는 페르시아와 카르타고 인들에 의한 그리스 본토에 대한 두 갈래 공격, 그리고 어쩌면 궁극적으로 그리스 문명의 소멸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480년 하밀카를 물리침으로써 겔론은 그 후 70년 동안 시칠리아를 카르타고인의 침략으로부터 간신히 해방시켰다.
겔론은 히메라 전투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신하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존경심은 공비를 들여 그의 기억 속에 세워진 정교한 무덤과 동상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겔론의 정복된 사람들에 대한 학대에도 불구하고, 존경받는 폭군이자 관대한 왕이라는 그의 명성은 세월의 흐름에서 살아남았다. 아마도 그의 시칠리아에 대한 영향력에 대한 가장 큰 증언은 티몰레온이 겔론이 죽은 지 150년 후 시칠리아가 민주주의가 되었을 때 폭군들의 통치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우려고 애쓰면서 그의 동상이 어떻게 면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참조
- ^ 156, 158, 191페이지의 Burry & Meiggs, 494–495페이지의 De Sélincourt의 Herdotus, 그리고 Britannica 등에 따르면, 그의 이름을 영어로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이 Gelon이다.
- ^ Clarke, Katherine (2018). Shaping the Geography of Empire: Man and Nature in Herodotus' Histories. Oxford University Press. p. 400. ISBN 978-0-19-255238-9.
- ^ a b 드 셀린코트의 헤로도투스, 페이지 494.
- ^ 189페이지의 Burge & Meiggs.
- ^ 드 셀린코트의 헤로도투스, 페이지 495.
- ^ Pritchett, W. Kendrick (1974). The Greek State at War: Part V.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ISBN 9780520073746.
원천
- Bury, J. B.; Meiggs, Russell (1975) [first published 1900]. A History of Greece (Fourth Edition). London: MacMillan Press. ISBN 0-333-15492-4.
- Herodotus (1975) [first published 1954]. Burn, A. R.; de Sélincourt, Aubrey (eds.). The Histories. London: Penguin Books. ISBN 0-14-051260-8.
- 묻어라, 존 B.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까지 그리스의 역사 맥밀런, 1922. 298-303.
- 프리먼, 에드워드 A. 초기 시칠리아의 역사 : 그리스 정착 초기부터 아테네의 개입 초기까지. 제2권 1891년 클라렌던 P에서 122-33.
- "겔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2008.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온라인 학교판 2008년 12월 4일 <http://school.eb.com/eb/article-9036333>.
- 하트, 존. 헤로도토스와 그리스 역사. 1982년 테일러 & 프랜시스, 62세
- 문, 마크 H 신들의 어머니 아테네와 아시아의 횡포 : 고대 종교의 주권에 관한 연구 뉴욕: 캘리포니아 대학교 P, 2006. 91-92.
- 오만, 찰스 초기 시대부터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까지 그리스의 역사. Longmans, Green, Co. 1901. 2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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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isholm, Hugh, ed. (1911). Encyclopædia Britannica. Vol. 11 (11th ed.).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559. .
외부 링크
- New International Encyclopedia. 1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