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에곤 폰 퓌르스텐베르크-헤일리겐베르크

Franz Egon von Fürstenberg-Heiligenberg
프란츠 에곤
Anselmus-van-Hulle-Hommes-illustres MG 0546.tif
태어난(1626-04-10)10 1626년 4월
죽은(1682-04-01)1 1682년 4월
귀족 가문퓌르스텐베르크
아버지에곤 8세
어머니호엔졸레른헤칭겐의 안나 마리아

프란츠 에곤퓌르스텐베르크-헤일리겐베르크(Franz Egon von Füestenberg-Heiligenberg, 1626년 4월 10일 ~ 1682년 4월 1일)는 신성로마제국의 독일의 백작이었다. 그는 쾰른 대주교 당선자의 총리였고, 동시에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위해 제국의 정세에 영향을 끼쳤다.[1] 프란츠는 결국 스트라스부르크의 비숍 왕자가 되었다.

초년기

프란츠는 30년 전쟁에서 바이에른 장군으로 활약한 후르스텐베르크헤일리겐베르크(1588~1635)의 에곤 8세의 장남이었다.[2] 1640년경 프란츠는 동생 빌헬름과 함께 체육관 트리코로나툼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헨리를 만나 세 가지 경력을 모두 지도할 우정을 맺었다.[3]

경력

그의 종교 경력은 일찍 시작되어 아홉 살 때 쾰른의 성당 지부에 합류했다. 1644년까지 그는 대주교 당선자의 추밀원 의원이었다.[4]

1650년 친구 막시밀리안 하인리히가 쾰른의 대주교 당선자 지위에 오르자, 그는 법정으로 가서 교회 생활을 받아들였다. 프란츠는 막시밀리안의 수상이 되었다.[5] 그는 곧 당선자에 대한 강한 영향력을 얻었고, 프란츠와 그의 동생 빌헬름도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공격적인 정책의 도구로서 대주교 당선자를 지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

1651년 마자린 추기경프론데 기간 동안 안전한 피난처로 쾰른에 머물렀다. 그 기간 동안 그는 프란츠와 빌헬름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들이 쾰른과 제국 내의 다른 땅에서 가진 영향력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들을 제국 내에서 프랑스 목표의 지지자로 육성하기 시작했으며, 라인란트 방어 동맹의 발전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지지했다.[6]

프란츠에게 종교적인 선호가 쇄도했다. 1655년 스트라스부르크, 에게, 힐데스하임 등의 지부에서 성직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직책들은 프란츠에게 수입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프란츠가 이들 왕자와 비숍에서 미래의 사무소장을 선출하는 데 영향을 주도록 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5] 는 후에 쾰른의 주교학장이 되었고 힐데스하임교주가 되었다.[2]

1657년 페르디난드 3세가 사망하자 추기경은 프란츠에게 차기 황제의 선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면서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 그 역할을 제안하기까지 했다.[7] 추기경은 제국의 그의 수석 협상가 후게스 라이온느에게 그들의 지지를 위해 형제들과 협상할 것을 지시했는데, 이는 왕이 황제 선출의 결과와 상관없이 계속되는 헌신적인 일에 대해 1만 8천 리브에게 돈을 지불할 것임을 시사했다. 1658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선거인단 소집에서 프란츠는 선거인단을 위한 호화로운 파티를 열었고, 선거인들이 프랑스 대표들과 만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가 마인츠와 작센의 선거인단을 위해 마련한 저녁 식사는 정오부터 9시까지 진행되었는데, 선거인들은 테이블 위에서 춤추는 것에 동참했다.[8] 1658년 6월 4일, 라이온, 프란츠, 빌헬름은 프랑스인들이 "독일의 모든 계획과 이익을 위해" 계속 일할 경우, 그 수치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지지를 상세히 기술하는 협정에 서명했다.[9] 여기에는 추기경이 메츠의 프란츠 주교를 만드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10]

레오폴트 1세의 대관식에 이어 프란츠와 빌헬름도 1658년 8월 라인동맹의 성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것은 새로운 합스부르크 황제에 대한 추가 견제로 프랑스에 의해 지지되고 합류되었다. 합스부르크 부부는 이 형제들에게 만약 그들이 리그의 구성을 중단한다면 상과 타이틀을 제공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거절했다.[11]

1662년 스트라스부르의 왕비주교가 사망하자 프랑스의 왕관은 프란츠를 후계자로 선출하기 위해 거액의 현금을 제공했다. 레오폴드는 그의 사촌인 지기스문트 프랜치스를 대신 선출하기 위해 비슷한 액수의 현금을 제공했다. 지기스문트는 아우로부터 추가 오스트리아를 물려받았을 때 탈퇴해야 했기 때문에 1663년 1월 18일에 프란츠가 선출되었다. 프란츠는 그 후 로마에게 더 나은 사람이 올 경우 이 직함을 포기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여전히 그의 친구를 쾰른 대주교 당선자로 계승할 희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이 요청을 거절했고 그는 사전 조건 없이 그 자리에 동의했다.[12]

1664년 레오폴드는 퓌르스텐베르크-헬리겐베르크의 영토를 군에서 공국으로 승격시켰고, 그들의 형이 영토를 지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란츠와 빌헬름에게 왕자 칭호를 연장하기도 했다. 이것은 형제들을 오스트리아에 더 가까이 끌어들이기 위해 행해진 것이지만, 별로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13]

후에 그는 루더스무르바흐의 왕자, 슈타블로, 말메디의 대장이기도 했다.[2]

1673년 프란츠는 새로 개조한 샤토 데 로한(무치히)으로 이사하여 스트라스부르의 주교들의 거처가 되었다.[14]

1674년 5월 11일, 황제와 쾰른의 선출자 사이의 조약의 체결에 따라 프란츠는 독일에서의 모든 선호를 박탈당했고, 프랑스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니메겐 조약(1679년)의 특별 조항에 의해 동생 윌리엄과 함께 사면되었다. 그는 쾰른으로 돌아왔다. 프랑스가 스트라스부르를 점령한 후(1681년) 그는 그곳에 거주하다가 1682년 4월 1일 사망했다.[15]

참조

  1. ^ 1978년 오코너 페이지 5, 12-13.
  2. ^ a b c d 치솔름 1911 페이지 366.
  3. ^ 1978년 오코너 페이지 2
  4. ^ 오코너 1978, 페이지 4.
  5. ^ a b 1978년 오코너 페이지 5
  6. ^ 1978년 오코너 페이지 5-6.
  7. ^ 1978년 오코너 7페이지
  8. ^ 1978년 오코너 9-11페이지
  9. ^ 파게스 1933 페이지 733-735.
  10. ^ 1978년 오코너 페이지 13.
  11. ^ 1978년 오코너 페이지 14-15.
  12. ^ 1978년 오코너 페이지 18-21.
  13. ^ 1978년 오코너 23페이지
  14. ^ 칼텐바흐 1992.
  15. ^ 치솔름 1911.

참고 문헌 목록

  • 이 글에는 현재 공개 도메인에 있는 출판물의 텍스트가 통합되어 있다. Chisholm, Hugh, ed. (1911). "Fürstenberg s.v. Franz Egon". Encyclopædia Britannica. Vol. 11 (11th ed.).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365–367.
  • Kaltenbach, Roland (1992). Le guide de l'Alsace. La Manufacture. ISBN 2-7377-0308-5.
  • O'Connor, John T. (1978). Negotiator out of Season. Athens, GA: University of Georgia Press. ISBN 0-8203-0436-0.
  • Pagès, Georges (1933). "Comment Guillaume de Fürstenberg entra au service de Louis XIV". Mélanges offerts à Nicolas Jorga. Paris: 727–737.
가톨릭 교회 직함
선행자 스트라스부르의 비숍 왕자
1663-1682
성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