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생활 말년의 영광
감독 대행으로 팀을 이끌던 조혜진
이름 | 조혜진(趙惠眞) |
생년월일 | 1973년 3월 20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학교 | 은광여자고등학교 |
포지션 | 포워드/센터 |
신체 사이즈 | 178Cm, 67Kg |
실업입단 | 1991년 상업은행 농구단 입단 |
소속팀 | 상업은행/춘천 우리은행 한새(1991~2005, 2008) |
2003 한국여자프로농구 겨울리그 MVP | |||||
이미선(수원 삼성생명 비추미) | → | 조혜진(춘천 우리은행 한새) | → | 변연하(수원 삼성생명 비추미) |
한국의 여자 농구 선수이자 지도자. 춘천 우리은행 한새의 프랜차이즈 스타. 2012년 춘천 우리은행 한새의 감독 대행이다.
덕성여고를 다니다가 팀이 해체되면서 은광여고로 전학을 가서 거기서 졸업을 했다. 졸업과 동시에 상업은행에 스카우트되면서 실업 선수로 뛰기 시작했다. 주니어 대표팀 시절에는 촉망받는 선수로 정선민과 함께 아시아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 골밑을 지키며 한국의 우승에 기여했던 선수.
국가대표로도 종종 뽑혔지만, 크지 않은 키 때문에 센터보다는 포워드 포지션에서 주로 뛰었다. 주전보다는 식스맨에 더 가까웠던 선수. 소속팀에서는 팀 사정 상 센터 포지션에서 주로 뛰었다. 고교 3학년 신분으로 참가한 농구대잔치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줬지만, 무릎 부상으로 한동안 고생하면서 인연이 없었다. 그러나 부상에서 회복한 후에는 다시 팀의 주전과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소속팀인 상업은행이 농구대잔치 시절에는 과거의 명성에 비해 스카우트에서 밀리며 그저 그런 팀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큰 대회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1997년 IMF 위기로 팀들이 대거 해체되면서 우수한 선수들이 분산되기 시작했다. 이 때 상업은행도 이종애를 비롯한 괜찮은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전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원래 센터였던 조혜진은 좋은 센터 자원들이 잇따라 들어오자 보직을 스몰포워드로 바꿔서 팀을 위해 뛰었다. 2000년 무릎 부상이 재발해서 은퇴 직전까지 갔지만, 팀에서 설득해서 은퇴를 보류했고, 2002년에는 빈혈로 쓰러져서 역시 선수 생활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3년 겨울리그에서 타미카 캐칭의 활약을 앞세운 우리은행이 정규시즌과 PO에서 모두 승승장구하며 1985년 전국 체전 이후 첫 우승이자 WKBL 첫 우승에 성공했다. 조혜진은 믿을 수 없어서 그날 그냥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데뷔 후, 12년을 뛰면서 맛본 첫 우승이었다. 조혜진의 말년은 그래서 행복한 편인데, 2003년 여름리그에서 다시 우승을 차지했고, 은퇴무대였던 2005년 겨울리그에서 또 다시 우승에 성공하면서 행복하게 은퇴할 수 있었다.
은퇴 이후에는 춘천한림성심대학 코치로 잠시 활약하다가 친정팀인 우리은행이 부진하자 코치로 컴백했고, 급기야 선수로 잠시 컴백해서 2008년 뛰기도 했다. 2011-12 시즌 우리은행이 감독의 선수 폭언 파동으로 감독이 중도 사퇴하자,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끌고 있다. 약체로 전락한 우리은행의 리빌딩을 끝까지 이룰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WKBL이 역대 여성 감독이 단 한 명도 없었는데[1], 조혜진이 첫 여성 감독이 될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듯. 하지만 우리은행을 나락으로 빠뜨렸던 두 번의 사건을 모두 방조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는 터라 팬들의 시선이 그닥 호의적이지는 않다.
결국 시즌이 끝난 뒤 팀이 위성우 감독, 전주원 코치 체제로 변화함에 따라 팀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