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hing Special   »   [go: up one dir, main page]

계유정난

癸酉靖難

조선 시대의 반정
무인정사계유정난
중종반정인조반정
문체반정
"지금 내 한몸에 종사의 이해가 매었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장부가 죽으면 사직에 죽을 뿐이다.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나는 너희들에게 강요하지 않겠다. 만일 고집하여 사기를 그르치는 자가 있으면 먼저 베고 나가겠다. 빠른 우레에는 미처 귀도 가리지 못하는 것이다. 군사는 신속한 것이 귀하다. 내가 곧 을 베어 없앨 것이니,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단종실록 8권, 단종 1년 (143년) 10월 10일 계사 1번째기사

1 개요

가장 명분이 부족한 반정[1][2]

1453년(계유년)[3], 후에 세조로 즉위하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세종문종의 고명대신이었던 김종서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나중에는 조카(단종)를 쫒아내고 스스로 왕(세조)이 되었으며, 단종은 일단 상왕으로 물러났다.
후에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 계획이 실패하자, 단종은 아예 상왕에서 폐위되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된 후 1457년 사사되었다. 그로부터 224년이 지난 1681년(숙종 7년)에 왕으로 복위되고 단종의 묘호를 받았다.

장자 승계원칙을 무시한 채 막내아들을 세자로 삼은 게 문제라고 들고 일어나 어느 정도 명분이 있었던 무인정사문제 있는 왕을 몰아내야 한다는 아주 확실한 명분이 있었던 중종반정, 집권 이후는 막장이지만 적어도 반정 당시에는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던 인조반정과는 달리, 계유정난은 어쨌든 세종과 문종의 고명대신으로서 단종을 보호하는 입장에 있던 신하들을 죽이고 단종도 끝내 죽였기[4] 때문에 명분이 아예 없었다. 이로 인해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의 정통성은 즉위와 함께 심각한 문제를 보이게 된다.

정난(靖難)이라 함은 "난리를 안정시켰다."라는 뜻인데, 일단 김종서와 황보인, 안평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것을 수양대군이 역쿠데타로 수습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조금 더 확실한 의미와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수양대군쿠데타"일 뿐이다. 그나마 반란이라고 하지 않는 건 수양대군에게도 왕위계승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명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사례인 정난의 변이 존재하는데, 이는 소위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안정된 통치를 완성하였다는 쿠데타 측의 '정난'이란 용어를 부정하고, 토목의 변 정강의 변과 같이 황제가 난을 당한 '변'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서,중국 역사학계는 한국 역사학계와는 다르게 확실히 균형잡힌 역사적 시각을 견지했음을 알 수 있다. 5.16 군사정변조차도 군사정변 내지는 쿠데타로 정정된 마당에 세조의 쿠데타가 언제까지 계유정난이라 불려야 할 것인가. 이 또한 정난의 변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2 계기

일단, 비극은 일단 문종이 미처 뜻을 다 펼치기도 전에 39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오늘날의 관점에서 젊은 것이다. 당시 기대 수명을 따져보면 중년은 훨씬 넘긴 것 단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한 사실에 있겠지만, 사실은 왕실에 수렴청정할 전왕의 왕후가 없었던 탓이 더욱 컸다. 세종의 비이자 단종의 조모인 소헌왕후는 세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는 세자빈 시절에 단종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 단종과 비슷한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당대의 여걸로 꼽히는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던 성종의 예를 생각한다면 차라리 문종이 배우자에 좀더 관심을 두는 편이 아들의 왕권을 지키는 가장 좋은 선택이 되었을수도 있다. 문종은 재위시절 왕비가 없었던 유일한 왕이다.[5][6][7]

어쨌든, 수렴청정을 해줄 왕실의 어른도 없는 상태에서 왕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세종과 문종은 대신들과 신료들에게 어린 단종을 보필을 해 줄 것을 많이 부탁했다고 하며 집현전 학사 성삼문신숙주세종대왕에게 이런 말을 들었던 것은 유명한 일화.[8]

특히 문종은 재위 시에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다른 말로 '고명대신').[9] 결국 단종초기에는 의정부와 군권을 장악한 당시 좌의정 김종서[10]를 중심으로 한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정분 등이 권력을 쥐게 된다.[11] 이런 상황에서 하필 왕의 숙부들은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능력있고 야심만만한 이들이었으며 부왕의 통치기에 정치, 문화 사업에 참여한 과정에서 각자 만만치 않게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과 셋째 아들 안평대군 등의 세력이 가장 강성해서, 사실상 왕실은 두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종 치세 후반기에 의정부 서사제등을 실시하여 대신들과 신료들의 권력이 강해진 상황에서도 태종이 다진 왕실의 권위는 여전히 강력하였으며, 수양대군은 대신들이 국정을 맡은 이런 상황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실록같은 매체는 권신 김종서들을 처단한 구국의 결단 비슷하게 기록을 해놓았는데, 이들이 전왕 세종과 문종의 총신들임을 생각하면 승자의 입맛대로 가공되었을 공산이 농후하다.

이런 분위기에 김종서나 황보인, 정분 같은 고명대신들은 강력한 종친의 존재가 자칫 왕권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을 했는지, 일단 가장 위협적인 인물인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안평대군금성대군을 포섭하게 된다.

하지만 사실 이 또한 여러매체에서 다뤄지듯 강력하게 수양을 견제했다기 보다는 이이제이의 수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단종 즉위에 대한 명나라의 인정을 받기 위해 수양대군을 명나라로 보내는데 사실 교통수단이 발달한 지금에야 하루에도 중국을 왔다갔다 할 수 있지만 그 당시 중국을 간다는 것은 왕가의 일원이었던 수양대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이나, 따라가는 노비나 역관, 의관들에게만 해도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수양대군의 세력이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간 동안에 얼마나 털려먹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종서나 황보인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수양대군은 명나라에 갔다올 만큼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고명대신이었던 김종서나 황보인에게 있던 권력이라면 아마 수양대군이 여러 매체에서 보여준 모습을 본순간 숙청해버렸을 정도의 힘이었다.

물론 수양대군이라고 이런 사태를 가만히 넋놓고 지켜볼리가 만무했다. 최대한 조용히 그는 수하에 권람, 한명회 같은 재능이 있으나 과거급제를 하고도 출세길이 험난한 혹은 과거 급제조차 못한 이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두뇌가 되어줄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대신들의 권력강화에 불만을 느끼고 있고 수양대군과도 세종대왕 시절 한글관련 문화사업 등으로 친하게 지내던 집현전 학사 출신 소장관료인 신숙주 등(사실 위에 언급한 명나라 사절단을 갔다오면서 신숙주를 얻을 수 있었다. 사실 신숙주에게 권람이나 한명회처럼 어떠한 아쉬움이 있었을까?)이나 명재상으로 명성이 높은 황희정승의 아들 황수신. 그리고 실제 충돌이 발생했을 때 수족이 되어 줄 홍윤성, 홍달손, 양정, 이징규, 이징석[12]등의 무관등을 끌어모아 세력을 키웠고[13]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정은 왕을 보필하는 유명대신들과 수양대군 세력으로 양분되게 된다.

종친들 중 세종의 큰형 양녕대군과 수양대군의 동생인 임영대군, 영응대군, 신빈 김씨[14]의 아들 계양군 등도 수양대군을 지지했는데 이 중 양녕대군은 대놓고 수양대군의 야심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동생인 세종이 재위기간 중에 그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쉴드를 쳐줬는지 생각하면 동생의 아들더러 동생의 적손을 몰아내고 왕이 되라고 하는 건 배은망덕한 짓이나 마찬가지다. 자세한 내용은 양녕대군 항목 참조.

3 계유정난 당시 상황

단종의 즉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수양대군은 책사 한명회등의 조언을 받아서 후일 왕권을 찬탈하기 위한 사전 쿠데타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시작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것이었다. 원래 안평대군이 이현로의 조언으로 사신으로 가겠다고 자청을 했던 사항이었으나 수양대군이 이를 저지시키고 자신이 가게 된 것이었다. 이때의 실록에 보면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갔을때 코끼리가 수양대군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절을 했다거나 중국인들이 수양대군을 부처님이라고 불렀다는 등등의 수양대군을 대놓고 지지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이 사행길을 통해서 수양대군은 상국인 나라에 자신이 조선의 유력한 왕자임을 알리고 인맥을 얻었으며, 후일 사후승인등에 도움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신숙주를 완전히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게 되며, 본래 목적이었던 김종서 등의 조정 대신들의 경계심도 어느 정도 무마시키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귀국 후, 수양대군은 수하세력들과 함께 방해가 되는 반대파 조정 중신들을 싹쓸이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그 유명한 한명회의 데스노트 생살부가 되겠다. 이 생살부의 첫머리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은 알아볼 것도 없이 반대파의 거두였던 좌의정 김종서였다.

음력 10월 10일. 수양대군은 수하 무관 양정, 홍달손 등을 통해 이미 준비하고 있던 수하의 병사들을 이끌고 경복궁을 점령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직접 관복 차림으로 김종서의 집으로 향한다. 재미있는점은 이날 거병을 준비하며 수하들을 통해 소집시킨 무인들앞에서 정난의 당위성을 설명하는데 들어볼것도 없이 역모라고 판단, 기겁하여 대열에서 이탈하여 북문으로 도주한 이들이 꽤 있었다. 얼마남지않은 수하들앞에서 수양대군은 혼자라도 결행한다며 몇몇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김종서는 거사 며칠 전 수양대군파인 신숙주, 최항의 방문을 연이어 받았고[15] 계유정난 당시 거사 당일엔 아예 핵심세력인 권람의 방문을 받았지만 설마하니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획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왕자의 신분인 수양대군을 공손히 대접하려 하였으나, 수양대군은 김종서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수하들과 함께 대기하면서 편지 한 통을 김종서에게 전달할 뿐이었다. 그리고 김종서가 편지를 달빛에 비춰 보는 순간, 수양대군의 신호를 받은 종 임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내리쳤고, 이어서 양정이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와 주변 사람들을 칼로 내리치면서 피의 정변의 막이 올랐다.

이후 수양대군은 서둘러 도성 사대문과 주요 군 시설, 요충지를 장악을 한 뒤 이미 장악당한 경복궁으로 들어간다. 궁에서 최초로 만난 사람은 동부승지 최항이며, [16] 수양대군은 최항에게 단종의 접견을 요청한다. 최항의 위치가 위치이니 만큼 국왕의 접견을 불허하거나 최소한 시간만 끌어줬다면 계유정난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겠지만 역사에 만약이란 말은 없는 법. 수양대군으로서는 신숙주의 후임인 최항을 당연히 자신의 편으로 생각했겠지만, 최항은 스스로를 수양대군파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 일을 엄연한 쿠데타로 인식했다. 수양대군은 최항에게 조정신료들의 리스트를 내놓으라고 하며, 최항은 처음에 말을 돌리며 넘기기를 주저했지만, 수양대군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명부를 넘기고 만다. 그리고 이 명부는 살생부가 되어 바로 빨간 줄이 그어지고 반대파들은...

수양대군은 국왕 단종에게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짜고 역모를 획책했다고 보고하였으며 한명회와 홍윤성, 홍달손을 시켜 광화문과 대궐문을 장악하게 된다.

이제 정난의 최종단계에서 단종의 명을 빙자하여, 조정 대신들을 모두 입궐하게 하였고 당시 조정 대신 중 수양대군에게 협조적이었던 공조 판서 정인지, 참판 이계전, 이순지 등은 무사히 다음날을 맞이할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파로 살생부에 적힌 영의정 황보인, 좌찬성 이양, 이조판서 조극관 등은 모두 철퇴에 맞고 살해되었다.

또 사실 심한 부상만 입었을 뿐이었고, 살아서 며느리의 친정집으로 피신한 후에 다시 궁으로 들어가려했던 김종서도 양정과 이홍심 등에게 발각되어 목이 잘리는 등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심지어 문종의 능인 현릉에서 비석 제작을 감독하고 있던 민신과 다섯 아들들을 현릉에서 참살하고, 문종의 고명대신인 우의정 정분은 일단 유배시켰다가 그의 처남인 정인지를 통한 회유가 먹히지 않자 결국 교형했다. 이로써 세종과 문종의 유지를 이어받아 정사를 주도하던 세력은 모조리 살해되어서 싹쓸이가 된다.

4 경과

정변 다음날 아침에 김종서, 김승규를 비롯해 황보인, 조극관, 민신, 이양 등의 신료들은 함께 역모죄라는 누명을 쓰고 저자거리에 효시되었고 이후 안평대군마저 역모로 몰아 강화도로 유배시켰다가 사약을 내렸으며, 살해된 조정 중신의 처첩, 자녀들을 노비로 전락시키고 공신이 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비정한 행보가 이어졌다. 사실, 이러한 작업은 조선이 아닌 어느 나라 왕조시대에도 초기 정변이나 반란이 일어난 이후에 정리하는 과정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장면이다. 그래도 시정잡배와 모리배를 동원해서 지금의 국무총리와 장관급 대신들을 살해한 천인공노할 짓이었음은 잊지말자.

또한 수양대군은 정난공신 1등에 수양대군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정인지를 좌의정에 임명했고 도원군[17]의 장인(사돈관계)이었던 한확을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스스로 영의정부사, 이조판서, 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 온갖 직위를 다 겸직하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또한, 자신의 일파들을 2등, 3등으로 책록하여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독점했으며 집현전에 자신을 찬양하는 글을 올리게 하는 등[18] 단종을 꼭두각시, 허수아비 왕으로 만들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행보를 계속하게 되었고, 결국 3년도 지나지 않아 숙부의 힘과 야욕을 견디지 못한 어린 조카가 그에게 양위함으로써 끝내 왕위를 찬탈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정난공신으로 책봉된 42명[19] 에는 그야말로 다양한 이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실제로 이후 단종 복위 운동에 뛰어드는 집현전 학자들이나 왕실의 인물 등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는데, 단순히 포섭용으로 보기에는 그 지위가 상당히 높고 실권을 포함한 직책들이 분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정난공신과 세조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임명한 좌익공신을 비교해서 해석하는 과정에서 계유정난의 참여세력에 대한 이견도 나타나고 있다.

계유정난의 파장은 상당해서 김종서의 측근인 이징옥이 후일 난을 일으키는 등 민심이 혼란해졌으며, 난이 평정되면서 또 다른 공신을 만들어 훈구파의 세력을 강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현재까지 전해내려오는 이 시절의 전설이나 야사를 살펴보면 민심이 단종에게 동정적이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수 있다. 동시에 세조측에 정2품송이 세조를 위해 가지를 들어주었다거나 문수보살이 세조의 병을 낫게 해주었다는 설화도 존재해서 상당히 이중적이다.[20] 현재까지도 세조의 천하의 개쌍놈 이미지를 매우 확실하게 심어준 사건이기도 하고.

다만 지금 남아있는 이야기들의 경우는 후대에 더해진 경우가 상당해서 어디까지가 당시의 관점이고 어디까지가 후대에 더해졌는지 알기 어렵다. 단적으로 숙주나물 드립은 신숙주 항목에서 알 수 있지만 명백히 후대에 덧붙여진 이야기로 당대에는 없던 단어이고, 사육신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남효온[21]의 육신전은 전기소설이고, 순수하게 평가하기에는 남효온이 김종직의 직전제자라서 초기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과정이 상당부분 걸린다. 단적으로 무오사화의 단초가 된 것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남효온과 사형제인 김굉필이 실록에 넣은 것이기 때문에, 이후 조선 중반 이후를 지배하는 사림은 이 문제를 상당히 강조했던 것도 있다. 때문에 후대에 민간설화가 가필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하므로 여러모로 어려운 문제이다.[22]

한때 성삼문이 정난공신에 포함되고 집현전 학사들을 비롯한, 훗날의 단종의 근왕파들이 적극적인 반대를 하지 않았다고 권신 김종서, 황보인등을 싫어한 소장파들이 권신을 몰아낸 계유정난은 찬성했지만 훗날 단종을 아예 몰아내는 일에는 반대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까놓고 말해서 헛소리다. 원칙에 살고 원칙에 죽는 집현전 학사들이 동네 양아치들을 모아서 일국의 대신들을 패죽이고 베어죽이는 일에 찬성하다는 것은 마치 보수정권을 군인들이 쿠데타로 몰아내면 야당과 재야인사들이 박수를 치며 쿠데타 세력에 동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는 소리다. 게다가 성삼문을 비롯한 소장파들은 계유정난의 축소를 위해 움직인 정황들이 포착되며 정난공신을 최대한 줄여서 수양의 파벌로 들어갈 신하들을 줄이려고도 노력했다.

5 영향

계유정난과 세조의 집권 과정에서 조선 전기에 문무를 상징하던 기관인 집현전총통위가 폐지되었다.

그리고 계유정난이 성공으로 끝난 탓에 계유정난을 이끈 공신들에 의해 관학파훈구파로 변질됐으며[23] 훈구파가 왕권을 약화시키며 조선의 정치계에 혼란을 일으키자 세조의 손자인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려고 사림파를 등용하게 된다.

왕권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계유정난을 평가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적장손 왕위 계승이라는 원칙이 무너지고 42명이나 되는 공신들의 세력이 생겨났기 때문에 오히려 조선의 왕권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공신세력들이 제일 활개를 치던 세조 시절엔 세조의 왕권이 너무 강했고 예종도 세조 못지않은 강성이었으며 그나마 그 뒤를 이은 성종 시절에서야 으스댔는데 문제는 성종이 장성한 이후부턴 정작 별 볼일 없어서 좀 무리한 해석이다. 그나마도 연산군이 그 훈구공신들을 갑자사화를 통해 대학살하고 명종 시기에는 소윤이 권력을 잡아 훈구는 별볼일없었으며 선조 시기에 가면 아예 사림이 집권하니 그 이후의 군약신강 운운하곤 관계도 없는 얘기다.

다만 왕권의 강화와는 별개로 공신세력들이 왕권을 등에 업고 반대세력들 축출에 앞장서는 등 부정부패와 전횡으로 인한 민생문제는 세조가 여러 민생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빠졌다. 또한 권력에서 멀어지고 있어서 세조의 편을 들어 준 종친들은 오히려 이 사건 이후 쿠테타 해봐서 잘 아는 공신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게 되었고 결국 구성군 이준 이후에는 가까운 종친이 높은 벼슬을 하는 일이 사라지게 되었다. 꼴 좋다! 후대에 계유정난이 괜히 욕을 먹는 게 아니다.

여담으로 수양 대군은 자기가 난을 일으키고 자기가 정리한 계유정난을 극복했다는 공로로 세조의 묘호를 받게 된다.

6 계유정난을 다루고 있는 사극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왕으로 즉위하여 비극적인 운명을 걸었던 단종과 권좌를 호시탐탐 노리는 수양대군. 그리고 실세(수양대군)와 대의명분(단종) 사이[24]에서 다른 길을 선택하는, 즉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인간 군상이 나오는 시기이기 때문인지, 사극의 단골로 언급되는 소재 중 하나인 사건이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사건을 다루더라도 드라마의 중심이 누구인가에 따라 관련 인물들의 캐릭터가 다르게 설정된다는 것. 가령 김종서를 보면 단종의 비극에 초점을 둔 사극에서는 그야말로 충신으로 묘사되지만 '고뇌하는 수양대군'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에서는 권력을 탐하는 권신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반대로 수양대군은 의외로 '국가를 위해 결단을 내린 영웅호걸'이자 '살육 속에 고뇌하는' 인간형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25] 공주의 남자에서는 피눈물도 없는 권력욕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관상(영화)에서는 마치 삼국지연의조비가 생각날 정도로 황제 왕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스토리상 주인공이 계유정난 당시까지 김종서 라인이었기에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1. 의외로 인조반정계유정난보다 좀 더 나름대로 정당한 명분을 가지고 있었던 반정이었다.
  2. 순수하게 야심으로 일어난 반정이다.
  3. 1453년은 세계사적인 사건으로도 중요한 연도 중 하나로, 오스만 제국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했으며 영국과 프랑스 간 백년전쟁이 종전된 해이다.
  4. 나중에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인조가 폐위된 광해군을 끝까지 보호해준 이유가 이런 점을 감안했기 때문이었다. 신하들의 압박과 연이은 반역 시도에 제주도로 보내기도 했지만 끝내 죽이지는 않았고, 전직 왕의 대접은 해줬다.
  5. 유난히 문종은 세자시절부터 여복이 없었던 왕이었다. 그 유명한 '레즈비언' 세자빈 봉씨가 둘째 세자빈. 그러나 왕 스스로가 여색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세자빈들의 운명이 불행해진 면도 있다.
  6. 세조는 자신의 어머니인 소헌왕후에게는 극진하였다고 하며, 그렇기 때문에 소헌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었더라면 계유정난이 일어나지 않았을거라는 설도 있다.
  7. 친모에게 칼을 겨누었다가는 온 나라 전체가 들고 일어날께 뻔했기 때문이다. 당장 광해군인조반정으로 끝장날때의 가장 큰 명분 중 하나가 바로 인목대비의 폐위라는 걸 보면
  8. 하지만 이 일화는 상당히 신뢰도가 의심스러운 일화이긴 한데, 세종의 차대는 문종이고 문종이 빨리 죽을지 어떨지는 모를 일이어서 살아있는 세자를 건너뛰고 세손을 부탁한다는 것은 예법에도 어긋나고 불길한 이야기이다. 때문에 성삼문과 신숙주라는 두명을 대비시키기 위해서 세종대왕이라는 그림을 넣어서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문제가 있다.
  9. 세 사람 중 남지는 얼마 후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였으므로 그의 후임인 정분이 대신 유지를 받들게 된다.
  10. 병조판서도 역임했었다.
  11. 이들은 대부분 노신들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의 불만을 사게 된다.
  12. 아이러니하게도 이징규, 이정석은 김종서의 측근 무관이자 후에 세조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킨 이징옥의 형제들이다. 훗날 이징옥이 난을 일으켰을때도 정난의 일로 이미 형제가 의절한 상황이었고 이 때 공을 세웠다고 하여 목숨을 부지 했다고.
  13. 심지어 천민 출신인 임자번까지도 끌어들였다. 수양대군의 사람들을 대체적으로 놓고보면 신숙주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앞길이 훤한 사람이 없다. 그나마 권람은 과거에 장원급제했음에도 생각만큼 출세가도를 달리지 못했고 한명회는 과거급제조차 못했다. 그외 나머지 인물들도 과거에 급제했으나 변변치 못한 한직을 전전하거나 급제조차 못한 사람이 많았던 형편이니 당시의 비주류 계층을 수양대군이 얼마나 포섭하려 했는지 알수 있다.
  14. 소헌왕후의 총애를 받아 세종의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 역할을 맡았다.
  15. 최항은 신숙주의 후임이자 콩라인였을 뿐 이 시점에서 수양대군파라고 보기에는 조금 미묘한 상태였다. 추가바람.
  16. 도부승지는 승지 중 최하위직이며 공조에 대응된다.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경제수석 정도. 하지만 도부승지도 승정원 소속인지라 왕실과 관련된 사안을 다루고 대소신료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역할을 수행하긴 했었다.
  17. 수양대군의 맏아들이다.
  18. 이 시기까지 집현전 같은 소장세력들은 황보인 보다는 세조 측에 더 기울어져 있었던 것을 추정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이 이탈하는 것은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직접 즉위하는 시기부터이다.
  19. 훈구파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세조의 즉위 이후 책봉된 소수의 좌익공신 들이다. 성삼문이 포함되었다가 사육신 문제로 제외되는 것 역시 좌익공신 이야기.
  20. 세조정권이 정통성 문제로 골머리를 썩었기 때문에 정부차원에서 의도적으로 퍼뜨렸을 수도 있다.
  21. 생육신의 일인이지만, 사육신 사건 때는 5세였기 때문에 자초지정을 알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애초에 단종폐위때 3세였던 남효온을 생육신에 포함하는 것도 논란이 많다. 이와 관련해서는 남효온이 김장생, 김굉필 등 초기 사림 관련 인물로 사화 때 타격을 입은 것 때문에 포함되었다는 평도 존재한다.
  22. 단적으로 조선 초기의 일화인 함흥차사황희와 연결되는 두문동 72현, 문익점과 목화씨 드립 등은 모조리 후대의 가필이다. 당대에 없는 일화가 후대에 가필되고, 이게 민간 설화처럼 퍼지는 경우는 너무나도 흔하다.
  23. 단 계유정난에 반대하거나 가담하지 않은 관학파는 은둔생활을 하게된다.
  24. 라고하는데, 저 관점은 계유정난 이후 세조 즉위 시기 즈음해서 등장한다. 정작 계유정난 시기에는 수양대군파의 세력이 안평대군 세력마저 흡수한 노대신들에게 한참 밀렸다. 애초에 그러니까 판을 엎은거지만.
  25. 독재정권 당시에 만들어진 작품에서 이런 경향이 심했는데 그 이유야 당연히 집권자들도 쿠데타 세력이라... 독재가 무너진 지 오래 된 지금도 그런 시각이 남아 있다는 게 문제지만